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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김기천 칼럼] 무역전쟁 시대, 손 놓고 있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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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뭔가 멋진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어느 소설의 한 대목이다. 주인공은 친구에게 그런 심경을 밝혔다가 “아직 어리구나”하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그런 기분을 느끼는게 어리기 때문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 콕 집어서 말하기 힘든 경우를 흔히 겪는다.

국가 지도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호하고 막연한 심리 상태가 국가 정책에 투영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많은 전문가들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통상정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 뭔가 하겠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듯하다는 이야기다. 즉흥적이고 변덕스러워 보인다는 평가도 이와 관련이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최근 “트럼프와 그의 팀이 원하는 게 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와 협상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제프리 프랑켈 하버드대 교수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전자(電子)같은 미세한 입자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게 무역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도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고 했다.

트럼프와 그의 참모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에만 그렇게 비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강공(强攻)은 오는 11월 중간선거와 2020년 대선을 겨냥한 전략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동안 중국과의 무역 분쟁이 심화될 때마다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이 반등했다는 분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모든 정치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책은 그 배경에 정치인의 이해가 깔려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각에서 보더라도 트럼프의 통상정책에는 목표가 분명치 않고 효과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최대 현안인 중국과의 분쟁을 풀어나가려면 유럽·일본 등과 공조해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려 하고 있다. 정책의 우선순위나 국가 전략에 대한 고려 없이 기분 내키는 데로 좌충우돌하는 모습이다. 우방과 동맹은 안중에도 없다. 그로 인해 중국과 유럽이 손을 잡고 미국과 맞서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 통신업체인 ZTE에 대해 초강경 제재가 가했다가 슬그머니 풀어준 것을 비롯해 정책이 오락가락하거나 서로 상충하는 경우도 많다. 걸핏하면 별 근거 없이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을 들고 나와 정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중국의 막대한 무역흑자를 비난하다 중국이 대책을 내놓으면 기술탈취를 문제 삼는 등 초점이 계속 바뀌기도 한다.

미국이 구체적인 요구조건을 내놓은 경우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뿐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적어도 무엇을 협상해야 하는 지는 분명히 밝혔다. 반면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알아서 기어라”는 식이다. “명확한 목표가 없는 이상한 무역전쟁이고, 아마추어 대통령의 변덕에 좌우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심지어 “백악관이 협상을 할 생각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다”는 지적도 있다. 무역 불균형 해소가 아니라 무역전쟁 자체가 목적인 듯하다는 이야기다. 폴 크루그먼 뉴욕대 교수는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은 미국 경제의 손실을 극대화하고 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고 비꼬기도 했다.

트럼프는 “무역전쟁은 좋은 것이고 이기기도 쉽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한 어떤 반론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무역전쟁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미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피해를 입고, 여론이 완전히 돌아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다. 세계 경제의 불운이고 비극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역전쟁이 본격화하면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 진전과 관련한 정치·외교적 상황 때문에 운신의 폭은 더 줄어들었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힘든 처지다. 뾰족한 방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답답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렇다 해서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무역전쟁의 쓰나미에서 살아남으려면 되든 안되든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 기업들만 전전긍긍 애를 태우는 지금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정부·여당의 책임이 무겁다. 고용 부진과 최저 임금 등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은 이제 끝내야 한다. 전전(前前)정권 탓이나 대기업 갑질과 임대료 핑계도 마찬가지다.

자유무역과 다자간 통상질서를 지키는 게 한국의 국익에 가장 부합한다. 결국은 여기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미국의 일방통행에 대한 국제 사회의 대응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힘을 보탤 필요가 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서두르고, FTA를 더 적극 활용할 방안도 찾아야 한다. 고래 싸움에 대비해 한국 경제의 ‘범퍼’를 확보하기 위한 지혜를 짜내야 한다.

조선비즈 논설주간(kck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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