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천안함 생존장병 PTSD, 이라크전 미군의 7배…“술·약 없인 잠 못자”

댓글 3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천안함, 살아남은 자의 고통

① “우린 패잔병” 유령처럼 숨쉰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건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우리 현대사에는 사건만 남고 그 속의 사람들이 잊히는 일이 종종 있다. 2010년 천안함이 캄캄한 서해로 가라앉은 사건도 그중 하나다. 지난 8년 ‘천안함 사건’을 어떻게 기록할지를 두고 날 선 다툼이 벌어졌지만, 정작 그곳에서 살아남은 장병 58명은 철저하게 소외됐다. 사회는 지금껏 그들이 얼마나 아픈지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한겨레>와 <한겨레21>,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 연구팀(김승섭·윤재홍)은 지난 3월부터 넉달에 걸쳐 ‘천안함 생존자의 사회적 경험과 건강 실태조사’(실태조사)를 준비했다. 사전 연구와 취재 등으로 완성된 설문지를 활용한 실제 조사는 지난달 5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됐다. 이 조사에는 전체 전역자 32명 중 75%(24명)가 참여했다. 생존장병 8명은 최소 3시간 이상의 심층 인터뷰에 응했다. 과학적 조사를 통해 천안함 생존장병의 건강 실태를 확인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겨레>는 외면받아온 그들의 8년을 세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생존장병의 직함은 그 바다에서 그들의 시간이 멈춰 섰던 2010년 3월26일 당시의 계급으로 표기했다.

한겨레

“그냥 술 마시다가 수면제를 한 움큼씩 삼켜요.”

정주현(28) 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2010년 3월26일, ‘그날’ 이후 정씨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다. 그 경계를 서성인 이들은 정 하사만이 아니었다.

<한겨레>와 <한겨레21>,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 연구팀(김승섭·윤재홍)이 지난달 공동으로 진행한 ‘천안함 생존자의 사회적 경험과 건강 실태조사’(천안함 실태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생존장병 24명 가운데 12명(50%)이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6명(25%)은 실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했다.

“참혹한 숫자네요.” 조사 결과를 확인한 김승섭 교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소방관, 성소수자 등 한국 사회의 수많은 고통을 연구해온 그에게도 선뜻 믿기 힘들 정도로 극단적인 수치였기 때문이다.

마음의 병에 영혼 좀먹어
25%는 지난 1년간 ‘자살 시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 87.5%로
걸프전 포로군인의 2배 가까워

몸으로도 나타나는 질병들
가끔 팔다리 오그라들고 발작
공황장애·폐소공포증도 나타나
고통 벗어나려 술에 의존해

손 내밀어주지 않는 사회
사건 ‘○주기’ 3월에만 반짝 관심
“보수는 우릴 이용, 진보는 무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로


이 숫자가 담고 있는 ‘고통의 무게’를 비교해볼 대상을 찾는 일마저 어려웠다. 총탄과 미사일이 쏟아지는 전쟁을 겪은 이들도 천안함 생존장병만큼 죽음과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립외상후스트레스장애센터 등 연구진이 2010년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미군(18~34살)의 최근 1년간 자살 생각률(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는지 여부)을 조사한 결과는 5.2%에 그쳤다. 천안함 생존장병들과 비슷한 연령대(25~34살)인 일반 남성을 상대로 한 조사(국민건강영양조사·2013~2015년)에서도 자살 생각률은 3.1%, 시도율은 0.1% 수준이었다.

“2함대 바다(서해)는 엄청 예뻐요. 밤이면 달도 밝고 별도 많이 떠서 바다에 비쳐요. 별똥별이 수도 없이 떨어지고 별자리도 하나하나 다 보여요.” 함은혁(29) 하사는 서해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날 밤, 아름다운 바다는 사라졌다. 폭발음과 함께 배는 급하게 기울었고 정전으로 불이 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암흑을 뚫고 균형 잃은 배를 탈출해야 했던 생존장병들의 몸은 다쳤고 마음은 부서졌다. ‘87.5%’라는 또 다른 숫자가 그들이 겪었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을 보여준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심리적 반응’을 뜻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진단받거나, 진단 뒤 치료를 받은 생존장병은 조사 대상 24명 가운데 21명(87.5%)에 달했다.

이 수치는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군인들보다 두배 가까이 많은 것이다. 쿠웨이트 연구진이 걸프전(1990~1991년)에 참전한 뒤 포로로 잡혔다 풀려난 쿠웨이트 군인 5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48%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 10만3788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거나 치료받은 사람은 1만3205명으로 13% 정도였다. 천안함 생존장병들의 마음속 상처가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가까스로 생환한 병사들보다 크고 깊었던 셈이다.

그들의 고통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생존장병은 응답자 24명 가운데 11명(무응답 2명)이었다. 조사 대상 생존장병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여전히 그날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채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천안함에서 살아남은 함은혁 하사는 ‘그날’ 이후 발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업무에서 벗어나 혼자 쉬거나 긴장이 풀리면 팔과 다리가 오그라들고, 동공이 풀리고, 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간다. 배에서 느낀 두려움은 공황장애나 폐소공포증으로 이어졌다. 공창표(30) 하사는 “공황장애가 있어서 버스나 배, 비행기를 타면 탈출구부터 찾는다. 여기서 사고가 나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지가 가장 먼저 걱정된다. 그런 상황이 너무 싫어 의사한테 말했더니 완전히 고칠 수는 없다고 하더라. 약물로 조금씩 무뎌지게 하는 수밖에…”라고 말끝을 흐렸다.

정주현 하사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다. 도망칠 통로가 없는 폐쇄된 공간을 버텨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추위도 두렵다. 반소매에 얇은 바지를 입고 탈출했던 그의 몸은 3월 밤바다의 차디찬 냉기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때론 이미 세상을 떠난 동료가 뚜벅뚜벅 눈앞에 나타나는 환상에도 시달린다고 한다. “왜 나한테 오는지 모르겠어요.” 정 하사는 일그러진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힘겹게 말했다.

제대로 된 심리치료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고통과 공포를 버텨내기 위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공창표 하사는 사고 직후 숙소에서 매일 1600㏄짜리 맥주 피처 하나를 먹고야 잠들 수 있었다. 고통을 나눌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술잔을 부딪칠 사람도 없었다. 정주현 하사도 마찬가지로 혼자 술을 마셨다. 그는 ‘그날’ 이후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퇴근하고 군복을 벗자마자 매일 홀로 맥주 피처 하나에 소주 두병을 섞어 먹었다. 함은혁 하사도 매일 소주 다섯병에 맥주를 섞어 마셨다고 했다. 다음날이 주말이면 술을 마시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그의 옆에는 항상 수면제가 있었다. 생존장병 중 4명(16.6%)이 지난해 ‘지방간’ 진단을 받았다고 답했는데, 비슷한 연령대(25~34살) 일반 남성의 지방간 진단 비율은 0.6% 수준이다.

8년. 그 긴 시간 어느 한때라도 누군가가 이들의 손을 잡아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은 천안함 1주기, 2주기 등 ‘○주기’가 돌아오는 3월에만 집중됐다. 지난달 <한겨레>를 만난 정주현 하사는 “왜 6월에 오셨어요?”라고 되물었다. 이연규(30) 하사는 “천안함 폭침이 있었던 3월이면 정치인들도 우리를 많이 찾았다. 우리는 우리 입장을 대변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보도된 뒤로 다시 우리를 찾지 않았다. 처음에는 고마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떤 말들은 날카로운 칼이 됐다. “보상 많이 받아 좋겠다”는 식이다. 국가로부터 보상 한푼 못 받았지만, 온라인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했다. “보상 많이 받았을 텐데 뭐 (사업이라도) 하는 거 없냐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반박해봐야 관계만 나빠질 것 같아 아무 말 안 했어요.”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도, 공창표 하사에게는 만날 사람과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생겨버렸다.

천안함이 가라앉은 ‘그날’ 이후 정부가 두번 바뀌었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2개월이 지났다. 김윤일(30) 상병은 정권이 바뀌고 첫 추모식에 대통령이 찾아오지 않은 게 섭섭했다고 말했다. “올해 3월 추모식 때 문재인 대통령이 안 오셨어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어떤 행사에 가고 싶다고 가고, 안 가고 싶다고 안 가는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섭섭하긴 하더라고요. 내년에는 오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천안함 생존장병들은 ‘유령’처럼 살고 있었다. 그들의 고통을 단순히 피해의식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보수는 저희를 이용할 뿐이었어요. 진보? 그쪽은 저희를 아예 찾지도 않았고요.” 더는 ‘천안함’이라는 주홍글씨를 이고 살 수 없어 망명하듯 프랑스로 떠난 최광수(30) 병장의 말이다. 그는 “도저히 한국에서 살아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모두에게서 버림받고 홀로 견뎌온 8년, 그들의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정환봉 최민영 기자, 변지민 <한겨레21> 기자 bonge@hani.co.kr



※ 이번 연재 기사에는 생존장병들이 당시 사건을 “천안함 폭침”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건의 원인을 둘러싼 과학적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생존장병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병들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 핫라인(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오늘의 추천 뉴스]
[▶ 블록체인 미디어 : 코인데스크] [신문구독]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