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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원시 男 사냥, 女는 채집? 근거없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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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 케임브리지大 교수 방한

“고고학적 증거없는 男학자들 주장… 모든 과학지식 성별-인종 영향받아

오류 바로잡는 다원주의 학설 필요”

동아일보

장하석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는 12일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이공계 분야에서 남녀 비율이 9 대 1이라는 의미의 ‘백설공주와 난쟁이 현상’이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방영문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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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은 사냥, 여성은 채집’이라는 명제는 학계의 정설(定設)처럼 여겨졌지만 20세기 이후 여성 연구자들에 의해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어요.”
12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만난 장하석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51)는 ‘획일화된 과학의 폐해’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이를 들었다. 장 교수는 남성 과학자가 수적(數的)으로 지배적인 현 상황에서 상당수의 과학적 지식은 남성 중심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원시 인류가 사냥, 채집을 했다는 걸 알게 된 남성 연구자들이 ‘사냥은 당연히 남자가 했겠지’ 하며 도출해낸 이론이다. 다양한 배경과 관점을 지닌 과학자들이 필요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의 동생이자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과 사촌지간이다. 장 교수에 따르면 모든 과학적 지식은 연구자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과학자의 성별, 배경, 인종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연구자 집단이 한쪽에만 치우쳐 있으면 과학 자체의 본질 또한 훼손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든 다른 예는 ‘정자와 난자의 성향’이다. 장 교수에 따르면 그간 생화학에서는 여성의 난자를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한 반면에 정자는 활동적이고 능동적인 개체로 봤다. 하지만 최근 난자가 정자를 화학적으로 ‘선택’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간의 이론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역할이 정자와 난자에 투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장 교수는 “남성은 능동적이고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사회적 관념 그대로 과학에도 적용됐다. 남성 연구자가 지배적이었던 생물학, 의학 등을 뜯어보면 이런 식의 오류가 정말 많다”고 지적했다.

연구자가 누구냐에 따라 과학적 진리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게 장 교수의 생각이다. 이는 그가 ‘과학에서의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다. 장 교수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의 이공계에서 여성과 흑인, 동양인, 중남미계 등이 소외돼온 게 사실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이 여러 관점에서 파고들다 보면 사회 전체적으로 얻어지는 게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2일 이화여대가 개최한 ‘이화―루스 국제 세미나’에 연사로 참여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의 강연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본주의 과학철학’이다. 과학은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학문이므로 과학 기술이 가져올 윤리적 문제나 사회적 여파를 고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장 교수는 “과학자들이 직접 연구실에서 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과학자들은 그런 생각을 해낼 훈련도 안 돼 있고 일반인 역시 과학은 전문 분야라 접근하기 힘들다”며 “두 영역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게 나 같은 과학철학자들의 임무”라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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