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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재즈 사랑 30년’ 예순여덟의 데뷔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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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차현

“음악이 나를 사람 만들어”

이름 걸고 삶 담아 첫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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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은 유복한 집안의 ‘록키드’였다. 고등학생 때 자기 방에 일렉트릭 기타와 앰프, 드럼이 있었다. 대학생이 된 뒤인 1970년 미8군 클럽 밴드에 들어갔다.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 롤링스톤스, 산타나 등의 곡을 연주하고 노래했다.

1972년 조용필과 밴드를 하기도 했다. 당시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조용필에게 기타 자리를 양보하고 베이스를 잡았다. 잘나가는 밴드만 선다는 서울 명동 프린스호텔 무대에도 섰다. 그는 “조용필이 기타도 잘 쳤지만 특히 노래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뻑뻑 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조용필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데뷔하기 전 이 노래로 함께 공연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군대에 다녀온 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잠시 했으나,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집을 나와 나이트클럽 무대를 전전했다. 1980년대 초 밥 제임스의 퓨전재즈 라이브 영상을 접하고는 재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 저거였어.’ 열심히 따라서 연주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계를 느낀 그는 나이트클럽 밴드를 그만두고 재즈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1989년 한국 최초 토종 재즈 클럽 야누스에 무작정 찾아갔다. 낮에는 연주자들과 어울려 합주하고 밤에는 종업원으로 일했다. 어느날 한국 재즈계의 대모이자 사장 박성연이 “저녁 무대에서 연주하라”고 했다. 재즈 연주자로서 첫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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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정성조 악단에 들어가면서 일렉트릭 베이스에서 콘트라베이스로 전향했다. “줄이 너무 팽팽해서 손가락으로 잘 눌러지지도 않더라고요.”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남들은 연주 잘한다고 찬사를 보냈지만, 그는 스스로 실력을 늘 의심했다. 한국을 찾은 캐나다 색소폰 연주자 커크 맥도날드의 특강을 듣고는 “깜깜한 방에 누군가가 구멍을 뚫어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길로 47살 늦은 나이에 커크 맥도날드가 있는 캐나다로 가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스스로를 향한 의심을 거둬들이고자 내린 결단이었다.

한국에 오니 어머니가 백혈병으로 몸져 누웠다. 돈이 필요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 재즈클럽을 운영하기로 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문 연 클럽은 6개월 만에 망했다. 2002년 서울 홍익대 앞에서 문 연 클럽 워터콕은 제법 잘됐다. 하지만 재즈 붐이 꺼지면서 손님은 줄어든 반면 월세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2년 만에 빚만 지고 나왔다. 3년간 택시 운전, 대리기사,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급한 빚부터 해결했다. 그 과정에서 허리를 다쳤다.

예전처럼 연주할 수 없었다. 대신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계기는 세월호 참사였다. “어른으로서 너무 창피한” 마음에 ‘수학여행’이라는 곡을 만들어 세월호 추모 음반 <다시, 봄>에 실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담은 곡들을 만들어나갔다. 이를 모아 지난 6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앨범 <차현 트리오 작품집 하나: 사랑시>를 발표했다. 68살에 내놓은 데뷔작이다. 피아니스트 양준호, 드러머 이창훈, 보컬리스트 말로·장정미·정민경 등 후배들이 힘을 보탰다.

“재즈 하면서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했던 적도 있어요. 하지만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보면서 깨쳤죠. ‘돈 없이 살아도 자긍심이 있으면 된다’. 음악이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줬습니다.” 그는 베이스를 치는 현자처럼 보였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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