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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수퍼·식당·백화점까지 … 영국 ‘소매업의 종말’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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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년 된 백화점 매장 절반 문닫아

점포 1700곳 감소, 금융위기 수준

온라인 대세 … 소매지출 20% 차지

“쇼핑가, 여가·사교장소로 변신해야”

중앙일보

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백화점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왼쪽)가 경영난으로 폐점을 앞두고 있다. 리모델링에 나선 바로 옆 존 루이스 백화점도 올 상반기 이익이 제로에 가깝다. [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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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영국 런던의 최대 쇼핑 거리로 꼽히는 옥스퍼드 스트리트.

브랜드숍이 밀집한 거리에 존 루이스,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 데번햄 등 대형 백화점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에 ‘최대 70% 세일’ 광고문이 내걸렸다. 169년의 역사를 지닌 이 백화점은 경영 악화에 시달리다 최근 영국 내 59개 점포 중 31개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6000명 가량이 일자리를 잃을 전망이다.

백화점 여성의류 매장에서 만난 한 직원은 “매출이 줄어드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표적 상권지역에서까지 문을 닫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바로 옆 존 루이스 백화점은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존 루이스는 소속 슈퍼마켓 체인인 웨이트로스와 연계해 온라인 판매를 강화해왔다. 백화점 제품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집 근처 웨이트로스 매장에서 다음 날 오후 2시 이후 찾을 수 있는 물류 시스템을 갖췄다. 그럼에도 올 상반기 이익이 제로에 가깝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2660만 파운드(약 393억원) 흑자에서 크게 줄었다. 이 업체는 웨이트로스 5곳을 닫을 예정이다.

옥스퍼드 스트리트 한 편의 가전제품 소매점 마플린은 이미 문을 닫아 유리창에 세를 놓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마플린은 수익 부진으로 법정 관리에 들어가 217개 매장을 닫아야 할 판이다.

이처럼 ‘하이 스트리트’(high street)로 불리는 영국의 쇼핑 거리가 휘청거리고 있다. 전 세계 쇼핑객이 몰리는 곳인데도 폐업 매장이 속출하고 있다. 회계법인 PWC에 따르면 영국 내 5000개 가량의 쇼핑 거리에서 지난해 5855개 점포가 폐점하고 2083곳이 새로 생겨 약 1700곳이 감소했다. 2010년 이후 최대치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보다 수익 부진에 타격이 커 ‘소매업의 종말’이 우려된다고 더타임스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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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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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점 쓰나미는 다양한 업종에 닥치고 있다. 영국 슈퍼마켓 체인 중 고급으로 꼽히는 막스앤스펜서도 2022년까지 전국 100개 매장을 줄이기로 했다. 미국계 장난감 판매점 토이저러스는 영국 내 100여 개 매장 철수를 결정했다. 식음료 업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피자 체인 프레조와 햄버건 체인 바이런도 점포 축소를 발표했다.

소매업체가 생존이 불확실해진 건 소비 패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온라인 라이벌의 시장 잠식이 가장 큰 위협이다.

영국 소비자들은 쇼핑하기 위해 예전 만큼 점포들이 늘어선 거리를 찾지 않는다. 가디언은 “인터넷 거래가 영국 소매 지출의 20%를 차지하고, 비식품 분야에서 온라인 쇼핑 규모가 지난해 7.5% 커졌다”고 전했다. 스마트폰이 일반화하면서 버스 안에서 소파를 사고, 소파나 침대에 누워 디자이너 핸드백이나 새 주방까지 구입하는 시대가 됐다.

온라인 전문 업체들은 더욱 진화하고 있다. 전 세계 상품의 가격을 비교해주던 데에서 나아가 구매한 상품까지 쉽게 교환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소비 피로’ 현상도 소매업계를 곤경에 빠뜨렸다. 요즘 젊은 층은 임차한 집에서 짧은 기간 거주하며 이동하는 경향이 있어 옷장이나 집을 물건으로 채우려 하지 않는다. 실질 소득이 장기간 감소하고 있는 것도 소비 규모를 줄였다. 지난해 물가는 3% 올랐는데 임금 인상률은 2~2.5%에 머물렀다. 지표상 실업률이 매우 낮지만, 비정규직 계약이 늘어 가계 소득이 감소했다고 가디언은 분석했다.

지갑을 여는 분야도 달라졌다. 바클레이 카드에 따르면 지난해 통신비 관련 지출은 11.4%, 레저나 오락을 위해 쓰는 돈은 10% 늘었다. 사교를 위한 술집, 카페 등에 대한 지출은 많아진 반면 여성 의류 지출은 대폭 하락했다. 비자카드의 최근 자료에서도 가전제품과 의류 지출은 계속 줄어드는 반면 호텔·바 등 즐기기 위한 지출은 증가세다.

여기에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가결 이후 파운드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해외 상품 공급 비용이 늘어난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동유럽 이민자가 줄면서 밴 차량 운전자 등의 임금이 오르고 있다. 이 와중에 지방 정부가 점포·사무실에 부과하는 세금인 비즈니스 레이트와 법적 최저 임금이 오르면서 소매업체는 다중고를 겪게 됐다. 소매업체들의 낙후된 경영 방식도 위기를 부추겼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소매 정보기관 에코 체임버의 매트 브라운 대표는 “소비자의 요구는 늘 변화해왔기 때문에 소매업체에겐 적응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쇼핑가는 과거 흥정이 이뤄지던 시장이었다가, 20세기 고정가격 상품을 파는 점포로 바뀐 데 이어 식료품과 가정용품, 의류를 구매하는 장소가 됐다. 이젠 쇼핑에서 여가나 사교를 위한 장소로 탈바꿈 중이다.

이에 따라 소매업에 소비자의 활동을 추가하는 업체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매그넘 플레져 스토어는 소비자가 벨기에산 초콜릿에 아이스크림 바를 담가볼 수 있도록 해 온라인 매장과는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런던 웨스트필드 쇼핑몰은 패션쇼를 여는 등 잠재 고객을 유혹할 이벤트를 선보였다.

영국에선 소매점이 수요보다 너무 많아 정책 차원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과도한 세금 인상을 시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브라운 대표는 “기존 소매업의 타격은 부유층보다 근로자 계층에 더 큰 불편을 준다”며 “서둘러 쇼핑가의 새 생태계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 관련 기사 The Times Record number of shops disappear from high street / High street must change — or shut up 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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