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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칼럼] 쓸모없음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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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문학은 지드가 콩고에서 탄식했듯이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하나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추문을 퍼트림으로써 이 비정한 세계의 가혹한 현실을 폭로하고 선의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든다. 문학은 그 쓸모없음이 마련해준 자유를 통해 실용주의에 매인 욕망에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그 실용성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김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학의 쓸모는 정작 그 쓸모를 거부하는 데서 얻는 자유와 해방의 귀중함에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한겨레
김병익
문학평론가


독일 본 대학 교수 헤르츠는 부도체도 통과할 수 있는 전자파를 실험하여 ‘라디오’로 명명되는 ‘헤르츠파’를 확인한다. 이 발견의 쓸모가 무엇이냐는 한 학생의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이 뜻밖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그냥 거장 맥스웰 선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실험일 뿐일세. 우리는 지금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미스터리한 전자기파를 확인한 거라고.” “그다음은요”라고 묻자 헤르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아마 교실 안의 젊은 대학생들은 박장대소하며 한바탕 시끄러웠을 것이다. 힘든 연구와 실험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거리’라니. 순진한 열정의 무용한 노력이라니! 그렇기에 학생들은 더 재미있고 신이 났을 것이다. 이 유쾌한 장면을 소개한 피터 왓슨의 <컨버전스>는 여기에 후일담을 붙인다. 헤르츠의 스파크 파동 논문을 읽은 이탈리아 청년 마르코니는 전자파동을 신호로 보내는 데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것이 편지나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던 통신 방법을 전보, 전화의 20세기 전자 통신으로 바꾼 혁명적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오늘에 이르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대체로 이처럼 무용한 이론적 발견이 문명적 실용으로 변용되어 이룬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며 회상된 것이 1960년대의 우주공학 개발이다.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여 인공위성이 지구 상공을 돌기 시작하자 미국은 불끈 일어서며 소련을 뛰어넘자고 외쳤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8년 항공우주국(NASA·나사)을 설치하여 냉전 시대에 소련과의 새로운 경쟁을 선언한 뒤를 이어 케네디 대통령은 인간이 10년 안에 달에 착륙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다. 마침내 1969년 7월 우주인 암스트롱은 달에 첫발을 내디디며 “이것은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라는 인사를 보냈다. 이 벅찬 역사적 장면을 나도 텔레비전 중계로 보면서 “인간의 문명을 우주로 비약시킨 인류사적 대전환”으로 감동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 모두가 흥분했던 것은 아니다. 그 이후의 우주선 사고로 귀중한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은 오히려 사소하게 보일 정도로, 우주과학에 들인 노력에 비해 거기서 거둔 실용적 성과는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신랄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분화구투성이의 달에서 가져온 것이란 돌덩이 몇개뿐이었다. 1966년의 나사 예산은 59억달러로 미국 국민총생산의 1%에 육박했고 직원은 3만6천명이 넘었다. 그들은 그즈음 우리나라 3500만의 국민총생산보다 훨씬 많은 돈을 쓰고 있었다. 막대한 경비에 비해 그 초라한 소득을 보며 그 엄청난 돈으로 굶주린 아시아·아프리카의 후진국 지원과 개발에 사용하면 세계는 좀 더 풍요해질 것이라는 발언이 설득력 있게 번졌다.

그러나 그렇게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후에 깨달았다. 그 자신 우주비행사였던 존스의 <나사, 우주개발의 비밀>은 인간의 우주여행을 위한 과학적 공학적 노력을 기록하면서 그 우주여행 기술이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 공헌했지만 특히 통신과 기상 두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쓰고 있는데, 나 같은 소심한 지식인들이 보기에도 이 평가는 너무 소극적이다. 그가 들고 있는 통신 기술과 기상학에의 기여란 직접적이고 제한된 범위에서만일 뿐이다. 인간의 달 착륙에는 20㎞ 거리에서 바늘구멍을 뚫는 일에 비교되는 초정밀의 과학과 공학 수준을 요구했고 각가지 새로운 소재와 기술의 개발, 우주 공간 상태를 견뎌낼 의학적 대비가 필요했다. 여기서 내게 특히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그 숱한 우주과학기술의 추진과 활용 및 산업화 정책에 대한 미-소 두 라이벌국의 상반된 정책이다. 소련은 미국보다 앞섰던 우주공학 연구와 실험 결과를 국가기관의 연구소에서만 하도록 폐쇄적으로 제한했지만, 미국은 우주여행을 위한 신소재·신기술의 개발, 여기에 필요한 컴퓨터공학과 그것의 범용화를 민간에 개방하고 외부 연구 및 산업 자본과 합작하며 상품과 서비스의 스마트화로 확산하도록 그 과학과 기술들의 산업화, 실용화에 개방적이었다. 30년 후의 그 결과가 미-소 간의 경제적 격차와 문명적 거리였고, 그로 말미암은 동서 냉전 구도의 해체였다.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된 것은 쓸모없어 보인 달여행을 위한 과학기술의 연구 결과들에서 비롯되었고, 무용한 노력으로 비판받은 우주여행 투자가 의외의 세계 체제 변혁을 추동한 것이다.

아직은 달의 지질 연구 자료로나 겨우 사용될 돌 몇개 주워 온 데 그친 우주과학이 그 당장의 성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창한 이념 세계의 지정학적 대결을 허물며 인간의 사유와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반전의 과정을 돌아보는 중에 떠오른 것이 해양학자 이상묵 박사의 지적이다. 미국의 현장 조사 여행 중 교통사고로 허리를 심하게 다쳐 ‘한국의 스티븐 호킹’이 된 그는 과학자들에 대한 국가적 지원의 양태를 <0.1그램의 희망>에서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까지 없는 새로운 연구라면 그게 무엇이든 무조건 연구비를 지급한다. 일본은 어떻게든 미국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라면 아낌없이 지원한다. 그런데 한국은? “이것에 투자하면 우리나라가 돈을 벌 수 있고 반도체, 자동차 이후의 주력 수출 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연구비가 나온다. ‘대박’을 내든가, 하지 않으면 치도곤당할 일에만 연구비가 지원되는 편협한 실용주의적 태도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처럼 목매듯 매달리는 노벨상은 이런 연구에 냉담할 것이다.

40년 전 김현은 <한국문학의 위상>을 썼는데 그 도전적인 책의 서두는 한가한 에세이풍 회고로 시작한다. 소년시절 소설책을 읽는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책을 읽어 무엇 하려느냐”는 어머니의 호된 꾸지람을 듣는다. 그는 머리 좋은 자식들이 으레 듣는 의사나 판검사 공부 대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학을 공부했고 비평가가 되어 마흔 나이에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습니다.” 문학은 지드가 콩고에서 탄식했듯이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하나 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추문을 퍼트림으로써 이 비정한 세계의 가혹한 현실을 폭로하고 선의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든다. 문학은 그 쓸모없음이 마련해준 자유를 통해 실용주의에 매인 욕망에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그 실용성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김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학의 쓸모는 정작 그 쓸모를 거부하는 데서 얻는 자유와 해방의 귀중함에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 사람은 쓸모없음의 인식을 통해 쓸모의 의미를 살피고 현실을 반성하며 거기서 문화와 예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이끌고 인문적 덕성과 윤리적 관용을 키우며 인간을 아름다운 가치의 세계로 고양한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쓸모없는 놀이의 추구와 그것들을 향한 열정이 인간의 자유로움과 거기서 얻는 해방감을 누리며 목적과 의무, 현실과 실용에 구속된 우리의 정신과 삶의 현장을 다시 바라보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환하게 열어놓는다. 역사가 이 쓸모없음의 쓸모를 실현하는 역설의 진실화 과정이며 그 깨달음이 창의적 존재로서의 삶의 이상과 정신의 품위를 정향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인간주의적 오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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