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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행운의 신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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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다툼이 생겨요.”

전업주부로 살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오십대 중반의 제자가 괴로움을 토로한다. 아이 낳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시부모 봉양하고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죽 살아왔다. 이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사회학을 시작했는데 공부할수록 그동안 잘 지내왔던 주변 사람들과 자꾸 부딪힌다. 그들이 여자에게 바라는 삶은 명확하다. 현모양처. 다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붙인다. 개인의 목소리를 도저히 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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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방대생 엄마가 떠오른다. 어릴 때는 남녀 차별을 잘 모를 정도로 남자애들과 어울려 지냈다. 집에서도 큰 차별을 못 느끼고 자랐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때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여자가 무슨 공부냐며 윽박지르는 아버지에게 못 이겨 인문계를 포기하고 상고에 진학했다. 가부장이 진짜 가부장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가족을 온전히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평생 성실하게 살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족 안에서 절대 권위를 휘두른다. 맞서 봐야 좌절감만 느낀다.

상고 진학 이후부터는 가부장제 아래 여자에게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살았다.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하고, 그곳에서 만난 남자와 1년 연애 후 스물두 살에 결혼하고, 첫아이를 출산하고 육아를 하며 전업주부로 지냈다. 하지만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는 돈 벌러 나가야 했다. 현모양처의 삶을 살고 싶었지만 남편의 경제 능력이 변변찮았다. 회사에 들어가서 내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말단직원에 불과했지만 점점 인정을 받고 나중에는 거의 오너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진짜 오너는 아니었다. 오너와 마찰이 생겨 결국 10년 이상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전도하러 온 사람을 따라 종교를 믿게 됐다. 힘을 얻어 다시 일을 구했다. 그곳에서도 성실하게 일했더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다.

이제 삶을 되돌아보니 큰 후회 없이 모두 다 잘되었다.

“살아가는 거 중에 그냥 하나하나 지나가는 것들이 그냥 우연 같지만 다 필연이라는 거지. 어떤 한 시점에서 이 과정들을 쭉 봤을 때.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

행운의 신정론! 내 의지나 행위와 무관하게 얻은 행운의 비합리성을 합리적 언어로 정당화한다. 과거 힘들 때를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눈물겹도록 행복하다. 그런데 이 행복이 사실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얻게 된 행운에 가깝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여자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왔더니 결국 인생 중후반에 행운이 깃든 것이다. 지금은 살아온 날들 중 어느 때보다도 좋다.

“이제 나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까 그것도 좋아.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좋아. 하루를 잘 살고 싶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딸들이 격하게 울부짖고 있다. 하지만 행운의 신정론에 빠져 있는 엄마들은 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부조리하다거나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을 이해하려면 우선 주어진 세계를 넘어 이상적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긍정적 언어를 창출해야 한다. 그 언어를 준거로 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보아야만 현실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현재 사회과학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페미니즘 책들이 수위를 다투고 있다. 그만큼 딸들이 자신들이 받는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해 달라는 거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CEO 총장이 장악한 대학에서는 페미니즘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취업이 존재 이유가 된 대학은 기업이 싫어하는 인재를 키울 수 없다며 그나마 있던 페미니즘 강의마저 없앴다. 어느 여대에서는 여성학을 여성지도자 과정으로 슬그머니 바꿔쳤다. 이러는 사이 젠더 분리주의와 남녀혐오라는 부정적 언어가 기승을 부린다. 행운의 신정론에 올라탄 악한 가부장제 습속이 일상을 지배한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긍정적 언어를 제대로 가르쳐 일상의 ‘평범한 악’과 다투게 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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