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컬처 DNA] '월간이 아니라 월갓이다.'
투믹스 연재작 '심해수'에 달려 있는 최다 추천 댓글 중 하나다. 월간으로 연재되는 이 작품의 퀄리티가 최상급이라는 의미에서 월갓(god)이라고 표현한 것. 지난 3월부터 매월 셋째주 월요일에 올라오고 있는 '심해수'는 웰메이드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는 작화와 방대한 세계관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심해수'는 운석 충돌 이후 해수면이 심각하게 높아지면서 육지가 사라진 미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배에 몸을 싣고 물 위를 표류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심해 괴물의 습격이다. 심해수의 기습으로 가족 간 생이별을 겪은 보타와 리타 남매는 바다 괴물을 잡는 작살꾼 카나를 만나며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월간 연재는 독자들에게 익숙지 않은 방식인데도 '심해수'는 이미 투믹스 대표 웹툰으로 올라왔다. 9회째(첫 달 1~4회 게재) 연재하는 동안 누적 조회수는 20만여 회에 이르며 댓글은 회마다 100~150개씩 달린다.
지난 9일 부천만화창작스튜디오를 찾아 '심해수'를 그린 노미영 작가(42)와 스토리 담당인 남편 이경탁 작가(42)를 만났다. 1998년 데뷔한 노 작가는 출판 만화 시장 불황기가 본격화한 2008년 후반 일본에서 '갱스터즈'를 연재하며 작가로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이후 '공각기동대' 프리퀄(prequel·오리지널 콘텐츠에 선행하는 사건을 담은 속편) 만화책 '공각기동대 어라이즈(arise)'를 그리며 한국 만화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갱스터즈' 이후 연재를 따내기가 쉽지 않았다. 신인 작가의 마음가짐으로 끊임없이 도전한 결과"라며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여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심해수`는 수몰돼버린 미래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다 괴물 심해수와 싸워나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진제공=투믹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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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연재했던 '살례탑'으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2008년 돌연 일본 격주간지 플레이 코믹에 '갱스터즈'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변화를 준 이유가 있나요
▷노미영=그 무렵 한국 만화 잡지가 폐간되기 시작했어요. 아직 웹툰 시장은 활성화되기 전이었고요. 연재처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2008년 일본에서 제안이 왔어요. 일본 '검은사기'라는 인기 작품의 스토리 작가가 만화를 새로 연재하는데 한국인 작가를 쓰고 싶어한다고요. 작품 주인공 한 명이 한국인이어서요. 그래서 '갱스터즈'라는 작품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연재하게 됐습니다.
-만화인의 꿈인 일본 시장에 진출한 셈인데요. 기쁨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노미영=그 만화가 끝난 다음에 새로운 연재를 따내기가 힘들었어요. 그때 온전히 제 힘만으로 '갱스터즈'를 연재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제 위치를 알게 된 거예요.
▷이경탁=일본에서는 완전히 신인이었으니까요.
▷노미영=연재가 끝난 다음에는 2012년 '히어로즈'라는 잡지 공모전에 도전했어요. 출판사를 찾아 다니면서 단편 콘티를 보여주고 편집자의 조언을 받기도 했죠. 그러던 도중 일본에서 먼저 활동하시던 박무직 작가님이 자기 담당 편집자를 소개해줬죠. 원래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만났는데 '주간 영매거진' 부편집장으로 '공각기동대'를 담당한 편집자더라고요. 주간에 3편짜리 단편을 연재한 후 그분의 제안을 받고 '공각기동대 어라이즈' 작화를 맡게 됐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작가로서 데뷔한 이후였는데요. 공모전에 도전하고, 출판사를 찾아 다니며 콘티를 보여줄 때 자존심이 상하진 않았나요.
▷노미영=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게 도움이 가장 많이 된 시간이었어요. 마감에 쫓기지 않으면서 캐릭터에 대한 고민도 충분히 했고요.
`심해수`의 작가 이경탁(왼쪽), 노미영 부부는 캠퍼스 커플로 만나 2003년 결혼했다. /사진제공=투믹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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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생활이 작가님 그림 스타일에 변화를 줬나요
▷이경탁=그 시기 노미영 작가 그림을 보면 실력이 느는 게 보입니다.
▷노미영=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정서적으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잖아요. 캐릭터가 달고 다니는 소품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독자들이 봐도 괴리감을 안 느끼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작업을 더 꼼꼼하게 하는 계기가 됐죠.
-일본 만화계는 경쟁이 치열한가요
▷노미영=상당히 치열한 것 같아요. 책 한 권 내고 사라지는 작가도 많고요. 10년 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건 좋은 편집자를 많이 만났기 때문이에요.
노미영 작가는 '심해수'도 일본에서 연재할 계획이다. 스토리를 맡은 남편 이경탁 작가가 일본 편집자에게서 해양 모험물 제안을 받아 1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세계관을 설정했다. 하지만 담당 편집자가 갑자기 유튜브 담당으로 보직을 옮기면서 연재가 마땅치 않아진 상태에서 투믹스 제안이 들어와 국내용으로 다시 작업하게 됐다.
-일본 쪽에서 연재하지 못하게 됐지만 그래도 일본 편집자와 '심해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좋았던 점이 있었다면요.
▷이경탁=일본 출판사는 우리나라와 달리 담당 편집자가 한 명 있고, 그 밑에 보조 편집자가 두 명 정도 더 붙어요. 한 작품에 작가와 편집자 세 명이 달라붙어 회의, 조율, 수정하는 시스템이에요. 이런 체계 속에서는 작가가 폭주하지 못해요. 그런 시스템을 많이 겪으면서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공부가 많이 됐어요. 다른 사람 생각을 차용하면서 내 작품이 나아지는 걸 보고 겸손해졌죠.
-심해어를 소재로 한 괴수를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어떤 작업을 거쳤나요.
▷이경탁=유튜브,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자료를 보면서 심해 물고기들에 대해 공부했어요. 또 잠수장비에 대해서도 연구했죠. 낡은 물건을 가지고 무기나 장비를 만드는 장르인 '디젤펑크'를 좋아해서 그런 느낌이 나게 그려봤어요.
-무섭게 생긴 심해수가 많이 나오는데요. 실제 심해어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가요.
▷노미영=처음에는 실제 심해어에 가깝게 그렸는데요. 무섭거나 기괴한 느낌이 약간 부족해 거기에 사람 얼굴을 더하는 방식으로 변형했어요. 편집자가 흡혈귀물 '피안도'를 담당했던 분이라서 디자인적으로 도움을 받았죠.
-우리나라 웹툰에는 방대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지 않은데요. 그래서 '심해수'가 더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미영=세계관이 그저 방대하기만 하면 독자들이 낯설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신선한 장면을 많이 넣어 독자들의 관심을 끌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보드를 타고 물 위에서 칼 싸움을 하는 장면도 다른 만화에서 본 경험이 없어서 이번에 넣어봤어요.
▷이경탁=세계관이 넓긴 한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고요. 너무 거창한 이야기로 나가면 수박 겉핥기 식으로 끝날 수도 있거든요. 수몰된 지구를 배경으로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여주려고 기획한 작품입니다.
퀄리티 높은 그림과 방대한 세계관을 갖춘 `심해수`를 독자들은 `월갓작품(월간작품과 갓을 붙여 만든 조어)`이라고 부른다. /사진제공=투믹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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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사람의 형상을 발견하고 다가갔는데, 알고 보니 심해수가 신체 일부분을 사람 모양으로 위장한 것이라서 놀라는 장면이 있습니다. 심해수가 사람을 유인하기 위해 쓰는 미끼라는 설정인가요.
▷이경탁=예. 실제로 심해아귀가 그런 식으로 사냥해요.
▷노미영=촉수를 먹이 모양처럼 바꾼 다음 자신에게 다가오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심해어가 있거든요.
▷이경탁=심해수들이 사람을 사냥할 때 사용하는 무기들이 있는데요. 실제로 존재하는 심해수 사냥법을 많이 참고했어요.
-예시를 들어줄 수 있나요.
▷이경탁=앞서 예로 든 아귀의 촉수라든가, 또 물로 딱총을 쏘는 새우도 있어요. 수압을 높여 충격파처럼 쏘는 거예요. 자기 몸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해 사냥하는 심해어도 있고요. 일반적인 심해어의 사냥법을 기본으로 과장해 만화에 실었습니다.
-소년 보타는 해양 공동체인 유니온부산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하필 부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나요.
▷이경탁=우리나라 항구 도시 중 발음하기가 가장 쉬워서요(웃음). 앞으로 유니온홍콩, 유니온요코하마 등 다양한 공동체를 접하게 될 거예요. 보타가 물 속의 도시라든가 재미있는 세상을 여행하는 모습도 그릴 거예요.
-앞으로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나갈 계획인가요.
▷이경탁=가족 단위로 움직이던 어린 보타가 커나가면서 하나의 공동체인 유니온부산을 만나게 됐는데요. 이후에는 세계연합도 만나게 될 겁니다. 소년의 성장과 함께 독자들도 점점 더 넓은 세계를 접하게 되는 방식으로 전개할 거예요.
-고질라 프로젝트의 작가로 섭외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노미영=작년 초 일본 잡지사에서 '고질라' 관련 만화 작품을 한번 해보자고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심해수'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두 만화 모두 퀄리티가 중요한 작품인데 한꺼번에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거든요.
노미영 작가가 2016년 일본 고단샤(講談社) 별책 소년매거진에 연재했던 역사물 '바운더(Bounder)'는 곧 한국에 수입된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한국 선수가 스페인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해 주전선수로 뛰던 도중 한국 프로팀과의 친선경기를 위해 내한한 격이다. "일본에서 펴낸 만화를 한국에 들여오는 건 내 꿈이었다"고 말하는 노 작가의 얼굴에 20여 년 전 만화가 데뷔를 위해 여러 공모전을 전전하던 만화가 지망생의 모습이 어렸다.
[박창영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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