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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밤이 오면 제주에 조명꽃 2만개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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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제주시 조천읍 오름 차밭 1만9800㎡ 규모에 설치된 브루스 먼로의 LED 조명 작품 `오름`. [사진 제공 = 제주 조명예술 축제 `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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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밤에 꽃 조명 2만1500개가 피었다. 영국 조명 예술 창시자 브루스 먼로(59)가 4년에 걸쳐 1만9800㎡(6000평) 규모 오름(화산 봉우리) 차(茶)밭에 심은 조명 설치 작품 '오름' 덕분이다. 제주 바람과 돌, 해녀, 오름에서 영감을 받아 광섬유, 유리, 아크릴, LED(발광다이오드) 조명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가느다란 막대기에 둥근 조명과 오름을 닮은 바람개비 형태를 달았다. 밤이 되고 조명이 켜지면 알록달록한 '불꽃밭'을 이룬다. 가까운 바다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들 불빛과 어우러지면 더욱 아름답다. 이 작품은 제주의 밤에 빛을 입히는 조명 예술 축제인 제1회 '라프'(라이트 아트 페스타) 대표작이다. 30여 년 조명 예술 관록을 쌓아온 먼로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제주에 평화를 상징하는 빛 작품을 선보인다.

지난 11일 서울 성균관대학에서 만난 그는 한국어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4년간 제주도를 수차례 방한하면서 한국어 몇 마디는 구사할 줄 알게 됐단다.

"제주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07년 화산섬과 용암동굴 지정)으로 유명해요. 많은 사람들이 휴가지로 방문하죠. 제가 처음 제주에 갔을 때 바람, 돌, 해녀가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해녀는 강인한 한국 여성을 상징하죠. 우리집에도 아내와 딸 셋 등 강인한 여성들이 있어요. 남자들은 아시겠지만 저희(남자들)는 설 곳이 없습니다.(웃음)"

그는 제주도 곳곳에 있는 오름에서 특별한 순간을 경험했다. 경사진 봉우리를 올라서는 순간에 물아일체(物我一體)인 경지를 느꼈다.

"나 자신의 존재를 덜 인식하게 되고 풍경과 연결된 것 같았어요. 나이가 들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 법을 배우게 됐죠. 바닷가에 앉아 있거나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혹은 도심 의자에 앉아 있을 때도 특별한 순간을 낚시질해요. 풍경에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 느낌을 스케치합니다. 너무 유별나서 친구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예요."

그는 오름에서 차나무를 제거한 후 '빛의 씨앗'을 심었다. 지난달부터 6주일 동안 협력 예술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을 동원해 땅에 단단하게 설치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제주 바람이 세서 작품이 날라가면 어떡할까 걱정했는데 최근 태풍에도 끄떡없었어요. 작품 설치를 도와주신 분들과 소주도 마시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죠. 그분들 열정이 없었다면 아마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그저 큰 케이크(작품)의 한 조각일 뿐이에요. 관람객들이 와서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케이크를 먹고 배를 채운 후 미소를 지으면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는 이 작품에 평화와 치유, 용서를 담았다. 2014년 그가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세월호 참사로 한국 사회가 슬픔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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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성균관대에서 제주 설치 작품 `오름`을 설명하고 있는 영국 조명예술 작가 브루스 먼로.


"예술 작품에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우리는 지금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는데 안 좋은 것들에 대해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어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트럼프 대통령도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오름' 인근에는 재활용 생수통으로 쌓은 39개 기둥으로 이룬 작품 '워터 타워스'가 설치돼 있다. 조명을 켜면 물병에서 빛이 산란하면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21세 때 읽은 미국 인류학자 라이얼 왓슨 저서 '인도네시아 명상 기행'에서 영감을 받아 설치한 작품이다. 소리를 색으로 인지하는 공감각적 재능을 가진 소녀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느낀 감정들과 사람들의 추상적인 모습을 표현했어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는 좋은 세상을 표현했어요. 우연히 슈퍼마켓에 물병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상상력을 발휘했죠. 저는 골프를 치지 않는 대신에 사물을 다른 각도로 보는 놀이로 즐겨요."

작품에 사용된 재료는 모두 재활용이 가능하며 친환경적이다. 전기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기 위해 LED 조명을 썼다.

"호주 사막 지역 울룰루에도 '오름'과 비슷한 작품 '필드 오브 라이트'를 심었는데 거미와 뱀들이 아직도 살고 있어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게 목표예요. 떠나야 할 순간에는 설치 작품을 제거하고 원래 땅 그대로 모습으로 남겨둡니다.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차나무를 다시 심어놓을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네요. 그 자리에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선다고 들었어요."

2016년 CNN이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전시 10'에 꼽힌 그의 작품은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 미국 펜실베이니아 롱우드 가든 등에 설치됐다.

제주의 특별한 야경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라프는 조천읍 9만9000㎡(3만평) 규모 대지에서 미국 조각가 톰 프루인, 뉴미디어 아티스트 젠 르윈, 프랑스 디자이너 장 피고치 등 작가 6명 작품 14점을 전시한다. 축제 기간은 27일부터 10월 24일까지지만 이후에도 계속 작품에 불을 켤 예정이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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