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8 (목)

일자리 뺏은 인공지능을 때려 부수는 순간 올까

댓글 2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산업혁명 당시 대규모 기계 파괴 운동 '러다이트 운동'이 벌어졌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생활을 통째로 바꾸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인류의 수명은 늘어났으며 의·식·주 모두가 윤택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고 태평양 건너에 있는 사람과 인터넷으로 실시간 대화를 하는 사회로 변했다. 하지만, 거대한 변화는 기존에 있던 관습과 전통을 흔들고 사라지게 한다. 기계의 등장은 새로운 기회를 줬지만, 그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은 생계를 걱정하고 심지어 기계를 파괴해야만 했다. 기술의 진보는 꾸준하다.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가치가 생겨났지만, 손해를 보는 사람도 생겼다. 과거 산업혁명 당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봤다. [편집자 주]
아주경제

사람 손에 의존하는 수공업 형태의 공장이 1550년대 생겨났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생계를 위한 선택, 러다이트

시장이 존재하기 전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가내수공업으로 수량은 적고 품질은 제각각인 물건이 시장을 지배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였다. 시장 규모가 커지자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 출현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직접 물건을 만들기로 했다. 큰 공장을 지어 생산 규모를 키우고 숙련된 노동자를 모았다. 공장에서는 여러 숙련공이 상인이 계획한 만큼의 물건을 만들었다. 이것이 ‘공장제 수공업’이라 말하는 매뉴팩처(Manufacture)의 시작이다. 규모는 있지만, 기계는 없으며, 사람 손에 의존하는 수공업 형태의 공장이다. 이 매뉴팩처의 시대는 1550년대부터 산업혁명이 태동하던 1760년대까지 계속됐다.

아주경제

영국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동상을 에딘버러의 로야마일 거리 중앙에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분업의 발견

위대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저서 <국부론>은 제목 그대로 국가의 부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저술한 책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부는 황금도 은화도 아닌 국가가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생산력의 정도로 봤다. 그에게 매뉴팩처는 흥미 있는 생산방식이 분명했으며, 숙련공의 생산량에 주목했다. 핀 공장을 관찰한 애덤 스미스는 업무에 능통한 숙련공이라도 하루에 20개 이상의 핀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노동자의 공정을 나눠 한 명은 철사를 자르고 다른 한 명은 철사를 다듬어 핀 머리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10명의 비숙련 노동자들이 공정을 분담해 작업하자 하루에 4800여 개의 핀을 생산했다. 애덤 스미스는 ‘분업’이란 개념을 발견한 것이다.

생산공정을 쪼개서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분업은 노동 난도가 낮았다. 이전에는 숙련공의 권력이 대단했다. 예컨대 숙련공이 제작일정과 재료준비에서 완성까지 모든 것을 결정했다. 노동자들이 숙련공의 지시를 따르는 도제식 노동환경이었다.

노동공정을 단순하게 만든 분업은 미성년과 여성 등의 비숙련 노동자만으로도 장인을 뛰어넘는 생산량 확보를 가능하게 했다. 장인이라 불리던 숙련공의 영향력 감소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됐다. 하나의 공정만 처리하면 되는 분업은 기계제 대공업의 출현을 앞당겼으며 드디어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압도적인 생산량을 보여준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아주경제

디트로이트 미술관에 있는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대부분 포드자동차 공장의 모습을 그렸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근대적 공장의 출현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산업혁명을 묘사할 때는 커다란 공장에서 여공들이 방적기 앞에서 일하는 모습이 꼭 나온다. 사람의 손으로만 생산했던 방직업에 기계가 등장하자 생산력은 급격히 상승했다. 방직업에서 기계 도입은 1733년 영국 기술자 존 케이(John Kay, 1704~1764)의 직조기계 플라잉셔틀(Flying Shuttle)의 발명이 시작이다.

방적공장에서 플라잉셔틀 도입은 획기적인 사건은 분명했지만, 시장 수요를 맞추기는 힘들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본격적인 방적기는 1769년 영국의 리처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 1732~1792)가 증기기관을 결합해 개발한 수력 방적기다.

사업수단이 좋았던 아크라이트는 대규모 공장설립을 계획하고 1771년 영국 중부의 더웬트 계곡(Derwent Valley) 부근의 크롬포드(Cromford)에 근대적인 방적공장을 지었다. 이곳에서 제작한 방적사가 영국과 유럽에 퍼졌다.

이 당시 영국 방직업종 생산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좋은 방법은 영국의 원면 수입통계를 보면 알기 쉽다. 그 당시 영국은 면화를 재배하지 않아 다른 국가에서 원면을 수입했는데, 1700년대 초에는 500t에서 1770년대는 2500t으로 5배 상승했다.

대규모 방직공장이 세워진 이후인 1800년대에는 2만5000t 수입으로 10배 정도 증가했다. 1782년 당시 아크라이트가 만든 공장의 종업원 수만 해도 5000명 정도로 규모가 컸다. 크림포트 공장은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숙소가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있으며 2001년에는 더웬트 계곡의 공장지역 일대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노동자의 자리를 기계가 차지하자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증대했다. 필연적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해준 기계는 기존 노동자의 자리를 밀어냈다.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식량이 필요했고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은 굶어 죽어야 함을 뜻했다. 겨우 일자리를 구한 노동자도 온종일 일해 빵 한 덩이만 겨우 먹을 수 있는 임금을 받았다. 이와 반대로 기계와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소득의 불평등은 빈곤한 무산계급과 화려한 유한계급을 만들었다. 아크라이트만 해도 사망 시 50만 파운드의 유산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회 변화를 유심히 관찰한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은 1899년에 <유한계급론>을 출판했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은 생산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돈과 권력을 소유한 집단으로 과시적인 소비로 자신의 지위와 존경을 뽐내는 집단이라고 말했다. 유한계급의 소비행태는 무산계급에 열등의식을 심어줬다. 무산계급은 유한계급을 모방하고 유행을 만들어 열등의식을 달랬다. 그러나 산업혁명 초기에는 자본주의가 성숙하지 못해 노동자의 임금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었다. 기존에 있던 일자리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일자리는 생기지 못한 일자리 구조의 과도기 상태에 있었다. 기계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낀 노동자들은 단합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저항하기로 다짐한다.
아주경제

커다란 망치로 방직기를 부수는 러다이트 일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분노한 노동자들 기계를 파괴하다

실업자와 노동자가 심상치 않은 행보를 보이자, 영국 의회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의 편을 들었다. 의회는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하고 노동조합의 결성과 파업, 단체교섭을 금지한다. 이를 어기면 법으로 처벌하기로 했다. 기계와 자본가에 이어 국가도 등을 돌리자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잃을 게 없는 그들은 망치를 들고 공장으로 향했다. 자본가가 소유한 기계, 공장에 있는 기계를 파괴한다면 지금처럼 절망스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1811년 노팅엄(Nottingham)에서 시작한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다.

기계파괴운동으로 번역되는 이 운동은 요크셔(Yorkshire)와 랭커셔(Lancashire), 체셔(Cheshire) 등 영국의 공장이 있는 지역으로 퍼졌다. 러다이트 운동은 네드 러드(Ned Ludd)라는 신출귀몰한 지도자의 이름에서 생겼다. 네드 러드를 중심으로 모인 노동자들은 어두운 밤이면 공장의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을 펼쳤다.

영국 의회와 자본가는 지도자 네드 러드를 잡기 위해 힘을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러드는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 아니라 러다이트 운동을 주도한 비밀조직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운동 조직원끼리 철저히 단결해 존재의 비밀을 지켜 정부는 그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1817년까지 지속한 러다이트 운동은 급기야 기계를 파괴하는 폭력적인 행동에 대중들이 지지를 보내는 현상까지 생겼다. 기계에 대한 반감이 생각보다 크자 자본가와 혁신가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결국, 러다이트 운동을 펼친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기계파괴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기계파괴운동에 한계를 느낀 노동자들은 훗날 의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을 벌인다.

기계의 등장은 진보며 혁신이 분명했다. 기계를 소유한 자본가와 혁신가의 입장에서 노동자는 진보의 물결을 거스르는 우매한 민중이었다. 특히 기계가 도입된 초창기에는 투자자들 사이에서 근거 없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무모한 낙관론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노동자는 어리석은가

노동자 입장에서 기계는 자신의 생계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였지만, 폭력적인 행동을 한 것이 꼭 기계 때문은 아니었다.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767년 발명된 제니 방적기(Jenny Spinning)는 방적공업 9명이 하는 일을 처리했다.

10명이 일하던 작업장에 한 명만이 남아 제니 방적기와 일을 해야만 했다. 노동자들은 관습과 인간관계에 기반을 둔 가치가 기계와 충돌하는 거부감을 느껴야 했다.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취한 것은 1796년에서 1815년까지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Nappoleonic Wars, 1797~1815)으로 경제 불황에 고용감소, 물가상승 등의 복합적인 상황에 기계의 등장까지 맞물린 것이 크다.

영국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의 역사학 교수 맥신 버그(Maxine Berg)는 저서 <기계 문제와 정치경제의 형성>에서 "18세기에는 '기계 문제'란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발전과 사회개선의 조화로운 통합에 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라고 서술한 바 있다. 18세기에 기계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모든 글을 신뢰하기는 힘들지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노동자와 기계의 갈등이 커진 사실만은 유추할 수 있다.

또 버밍엄대학교(University of Birmingham)의 역사학 명예교수 에이드리언 랜달(Adrian J. Randall)은 논문 <러다이트주의의 철학: 서부 잉글랜드 방모사 노동자들의 사례, 1790~1809>에서 당시 기계 소유주의 입장은 "기계의 제한 없는 도입을 옹호하는 혁신가들의 주장에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뒤엉켜 있었지만, 그것의 근거는 성장과 경제적 진보의 관념"이며 "새로운 방모사 기계는 농사에 사용되는 가래와 쟁기의 후예로, 기계는 예전보다 옷을 더 값싸게 생산할 수 있게끔 해주는 도구다. 따라서 기계의 도입은 즉각적으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이뤄져야 하는데, 만약 기계화에 실패한다면 외국의 경쟁자들에게 패하게 될 것이고, 이는 자본가들뿐 아니라 노동자들까지도 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추론했다.

자본가들은 기계만 도입되면 영원히 번성할 것이라는 전망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기계제공업의 경쟁이 심화 되면 제품이 시장에 과잉공급되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 그런 현상이 나타나자 언젠가는 성장이 멈출 수밖에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본가도 인정했다. 그러나 언제 일어날지 모를 사건으로 현재의 수익을 포기하는 자본가는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러다이트운동은 실패했고 기계는 더욱 발전해 노동자들이 풍족한 생활을 하도록 도와줬다. 기계 파괴로 기술의 진보를 저지하려고 애쓴 노동자를 비웃는 꼬리표는 아직도 따라다닌다. 에이드리언 랜달은 "기술의 승리는 필연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모두에게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무지몽매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한 치 앞 이상'을 내다볼 수 있었다"라며 "그 미래는 그들이 원치 않던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많은 이들은 기계가 '자기 입에 들어갈 빵을 빼앗아간다'고 믿었던 점에서 옳았다. 다른 이들은 기계가 자신들이 그에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던 뭔가를 빼앗아갈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당시 노동자의 입장을 설명했다.

설령 기계로 인해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생산단가가 낮아져서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을 기회가 커져도 숙련공은 사회적 지위의 상실과 그들의 유일한 자산인 숙련기능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주경제

구글 통근버스를 향해 항의 중인 오클랜드 주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술혁신과 네오 러다이트

산업혁명 이후에도 기술은 꾸준히 발전했다. IT기술도 새롭게 등장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을 불러왔고 이제 창의적인 영역까지도 기계의 위협을 받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렇다면 기술발전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찾아올까? 과거의 러다이트 운동은 오늘날 네오(Neo) 러다이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기술의 발전에 저항한다.

현재까지 네오 러다이트는 노동자보다 지역민이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적인 IT기업 구글(Google)은 지역민의 물리적 폭력에 고민한다.

구글은 미국 실리콘밸리 사무실과 오클랜드를 왕복하는 통근버스를 운영했다. 오클랜드의 특정 지역에 구글 직원이 밀집해 거주하면서 주택 월세와 매매가는 상승했다. 지역민들은 구글이 만든 IT서비스로 기존 생활기반인 지역 서비스업을 황폐화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택가격 상승은 지역 고급화를 불러왔다. 기존에 살던 지역민은 감당할 수 없는 동네로 변했다. 물가는 올랐고 IT와 관련 없던 직장은 사라졌다.

지역민은 2013년부터 오클랜드에 들어서는 구글의 통근버스를 막아서며 위협했다. "구글 꺼져라.", "공돌이들은 환영받지 못한다."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통근버스를 습격하기도 했다. 애플도 통근버스를 운영한다. 이들 IT기업의 임직원들이 거주하는 샌프란시스코 근교 여러 지역의 주택 임대료가 1년 새 10~135%까지 상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은 지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통근버스 대신 지역 사설 업체와 손잡고 149명이 탑승 가능한 고속 여객선을 운영하고 정류장 사용 비용을 샌프란시스코에 지급하기로 했다.

러다이트운동은 생존권이 당장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당시 혁신가는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 노동자들을 비웃었다.
지금은 지식기반 사업에도 로봇과 인공지능이 투입된다. 병원 수술실에도 수술용 로봇이 의사를 도와 수술을 진행한다. 가까운 미래에는 의사가 필요 없을 수 있다. 인공지능은 휴식을 모르고 계속 학습해 숙련공이 된다.

새로운 변화를 읽고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미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이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버클리 대학에서 수학 교수로 재직한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Theode John Kaczynski)는 기술의 진보가 사회를 황폐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자신의 글을 많은 사람이 보고 변하길 원했다.
아주경제

카진스키(유나바머)의 모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다.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과학자, 사업가 등 기술 진보와 관련된 인물을 폭탄테러로 3명을 살해하고 29명을 다치게 했다. FBI는 그를 대학, 항공사, 폭파범이라는 단어를 조합해 유나바머(Unabomber)라는 이름을 만들어줬다. 카진스키는 1995년 자신의 글 <산업 사회와 그 미래>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사에 실어준다면 폭탄 테러를 멈추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FBI는 이를 수용한다. 카진스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까지 알리고 싶던 말은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류의 삶을 관리하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글 한 토막만으로도 카진스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인류가 어느 순간 기계들에 너무 의존한다면, 기계가 내리는 모든 결정을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게 되어 결국 아무 실질적 선택권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 마주칠지 모른다. 마침내 시스템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결정들이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의 능력으로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단계가 온다면 인간에게 기계를 꺼버릴 능력이 있을 수 없다. 기계에 대한 의존이 너무 커서 기계를 끈다는 것은 곧 자살 행위가 될 테니까 말이다."

카진스키의 글은 비관적인 미래를 담았다.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을 때 인류는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 산업혁명 당시 두려워 보이기만 했던 기계는 이제 인류와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은 지난해 6월 "인간은 인공지능(AI)과 싸워서 이길 수 없다. AI 혁명이 벌어지고 있는데 생명존중 사상을 바탕으로 AI 기술을 받아들이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자세가 필요하다"며 "인간은 말과 경주하지 않는다. 말의 등에 올라타 이용하는 존재로서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의 말에서 인류와 기술이 공존할 지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윤경진 기자 youn@ajunews.com

윤경진 youn@ajunews.com

- Copyright ⓒ [아주경제 ajunews.com] 무단전재 배포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