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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길지만 봐야 할 뉴스] "방학이면 날아오는 '폭탄'"…엄마는 오늘도 '숙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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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氣 살리자] ⑪ ‘엄마 숙제’될 만큼 어려운 초등생 숙제 / 맞벌이 부모들 “아이 숙제 좀 도와주세요” 대행업체 ‘노크’ / 버몬트·뉴욕주 등 일부 초등학교 솔선 / “하교 후 가족과 함께 다양한 경험” 권고 / 일부 전문가들 “쉬운 숙제 내줘야” 주장

세계일보

#1.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A(36·여)씨는 요즘 자신이 초등학생이 된 것 같다고 털어놨다. 아이의 학교가 끝나는 오후 1∼2시쯤이면 휴대폰으로 다음날까지 해 가야 할 숙제 목록이 날아온다. 학습지 풀기부터 방울토마토 모종 관찰까지 대부분 부모가 도와줘야 할 수 있는 숙제들이다. A씨는 “초등 1학년치고 숙제가 터무니없이 많은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2.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자영업자 B(35·여)씨는 얼마 전 초등학교 3학년 딸의 숙제를 도와줄 대학원생 과외교사를 구했다. 수십만원에 달하는 과외비가 부담돼 직접 봐주고 싶어도 영어로 일기쓰기 같은 숙제는 엄두가 안 났기 때문이다. 풀어야 하는 문제집도 과목별로 여러 권이다. B씨는 “이 정도면 학교가 사교육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초등학교 숙제가 여전히 ‘엄마 숙제’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 교육당국 차원에서 ‘숙제 없애기’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일선 학교 교사 중엔 숙제를 과하게 내는 교사가 아직까지 상당수다. 이로 인해 자녀의 학교 숙제가 부담된다고 호소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 과도한 초등학교 숙제가 선행학습을 유발하고 사교육 시장을 배불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국 권고에도 교사마다 제각각

일부 시도교육청을 중심으로 초등학교 숙제를 없애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의 ‘숙제 없는 학교’ 정책이 대표적이다. 올해부터 초등 1, 2학년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 숙제 없는 학교는 일선 학교들에 양이 과도한 숙제나 정식교육과정에서 아직 한글을 배우지 않은 1학년에게 한글을 꼭 알아야 할 수 있는 숙제를 내지 말라고 권고하는 정책이다.

학부모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11일 교육업체 비상교육이 지난 3월 초등학교 자녀를 둔 학부모 621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62.8%가 숙제 없는 학교에 찬성했다. 찬성 이유로는 부모의 부담감소(36%), 자녀의 학습 부담 감소(34%) 등이 꼽혔다. 서울교육청은 매달 교장 회의, 각종 연수, 신규 임용 때마다 숙제 없는 학교를 홍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국의 이런 노력에도 현장에서 체감하는 부담감은 아직까지 상당하다는 게 학부모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교육청 정책에 공감하고 숙제를 없애거나 크게 줄이는 교사가 있는 반면 일부 교사는 관행처럼 ‘숙제 폭탄’을 떠안긴다고 한다. 교육청으로서도 딱히 이런 교사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숙제는 교사의 고유한 권한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서울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교육청 차원에서 교사의 재량권을 침해하기 어렵다”며 “학급마다 숙제 부담이 다르다면 결국 선행학습 유발 방지와 공교육 신뢰 회복이라는 당초의 목적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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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적어도 부담되긴 마찬가지

물론 과거에 비해 초등학교 숙제 양이 전반적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숙제를 단 하나만 내더라도 학생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라든지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이라면 부모 입장에서는 소홀히 하기 어렵다. 가령 초등 1, 2학년 단골 숙제인 일기나 독후감은 한글을 알아야만 할 수 있는 숙제들이다.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해갈 수 없는 숙제다.

한글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초등 1, 2학년의 쓰기 능력으로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박태호 공주교대 교수(국어교육과) 연구팀의 ‘국어 표현에 대한 초등학생의 쓰기 특성 및 발달 고찰’ 연구 보고서를 보면 초등 1학년의 쓰기 능력은 100점 만점에 58.43점으로 전체 평균인 72.99점에 한참 못 미친다. 2학년 역시 70.02점으로 전체 평균보다 낮은 수준이다.

경쟁을 유도하는 숙제를 내는 학교나 교사도 제법 된다. 수도권의 한 초등학교는 지역 특산물 등의 자료조사 과제를 내준 뒤 그 결과 보고서를 제출하게 해 수행평가에 반영하고 있다. 이 학교 C(30) 교사는 “간혹 부모가 숙제를 해준 게 티가 나는 학생들이 있는데,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학교 방침상 수행평가를 안 할 수도 없어 달리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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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업체·과외 찾는 학부모들

자녀 숙제에 신경을 쏟기 어려운 학부모들, 특히 맞벌이 가정 학부모들은 숙제대행업체나 과외교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기자가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숙제대행’이란 검색어를 쳐 보니 대행업체 10여곳이 떴다. 이 업체들은 주요 과목뿐만 아니라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체능 과목 숙제도 중복이나 표절 등 문제 없이 도와줄 수 있다고 광고한다.

일대 일로 의뢰를 받아 숙제를 대신 해결해 준다는 한 업체는 이날 현재까지 누적 방문객이 1만4000명을 넘어섰다. 학생회장 연설문까지 대신 작성해준다는 또 다른 업체도 방문자가 5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의 숙제 자체를 돌봐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학부모들은 숙제를 도와주는 과외교사를 찾기도 한다. 초등학교 숙제 과외교사를 하며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D(30)씨는 “과외중개사이트를 통해 초등 수학이나 영어 과외를 구한다”며 “초등학생 학부모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도 아이의 숙제를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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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애진 못해도 부담은 덜어야”

전문가들은 당국이 지금보다 좀 더 강제성을 가진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숙제를 아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학생과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쟁을 부추기거나 가정 환경에 따라 차별을 느낄 정도의 숙제는 지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학교와 교사들에게도 이런 부분을 꾸준히 설득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은순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은 “초등학교 숙제는 학생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평가에 반영해서는 안 된다”며 “아이들이 숙제를 잘 했든 못 했든 차별받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과)는 “과도한 경쟁을 불러오거나 선행학습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학교 숙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 교육당국이 지금보다 조금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며 “독일의 경우 부모가 자녀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이 발각되면 교사가 해당 가정에 ‘학생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경고장을 보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이어 “해외 선진국 초등학교들도 대부분 숙제를 내주지만 평가 목적이 아닌 학생의 창의력 발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우리도 숙제에 관해 이 같은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시간에 신나게 놀아라”… 숙제 없애는 美 초교들

미국에서는 수년 전부터 숙제가 아예 없는 초등학교가 늘고 있다. 교육적 효과가 불분명한 숙제보다는 운동 등 야외활동을 하며 신나게 뛰어놀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더 많다는 판단에서다. 숙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전문가들도 “어린 아이들에겐 짧은 시간 안에 쉽게 할 수 있는 숙제를 부과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11일 미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버몬트주 사우스벌링턴의 오차드 초등학교는 이미 2006년부터 숙제를 내지 않고 있다. 당시 언론의 큰 관심 속에 과감하게 숙제를 없앤 학교장은 미국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이 쓴 ‘숙제의 신화’란 책을 읽고 결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알피 콘은 책에서 “숙제는 힘들기만 하고 얻는 것이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뉴욕주의 116 공립초등학교는 2015년부터 모든 방과후 숙제를 없애는 대신 학생들에게 “하교 후 가족과 함께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권고했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체리 파크 초등학교도 2016년 숙제 없애기 대열에 합류했다. 뉴욕시 브루클린의 파크슬로프 초등학교는 숙제 대신 마당 가꾸기나 가족여행 등 홈프로젝트 활동을 하도록 방침을 바꿨다.

‘숙제 없는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한다. 이들 학교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후 집에서 책을 읽거나 밖에 나가 뛰어놀고, 가족과 저녁을 먹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대다수 학부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숙제를 없앤 한 초등학교 교장은 “보면 볼수록 숙제는 별 가치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다만 아직까지는 숙제를 내는 학교가 월등히 많다. 숙제의 교육적 효과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30여년간 숙제의 효과를 연구한 해리스 쿠퍼 듀크대 교수(심리학)는 “모든 학교가 숙제를 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1987년부터 2003년까지 학생 60여명을 상대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숙제가 학업 성취도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숙제가 필요하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학생의 능력에 맞는 숙제를 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쿠퍼 교수는 “숙제는 약과 같아서 너무 적게 하면 효과가 없고 과용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며 “초등학생에겐 짧은 시간 안에 쉽게 할 수 있는 숙제를 부과해야 반발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숙제 시간을 10분씩 늘리라”고 조언했다.

김청윤·김주영 기자 pro-verb@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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