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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내 학문적 기반은 리영희·민두기·백낙청 ‘세 스승’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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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대학 강단’ 떠나는 동양사학자 백영서 교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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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완성은 청춘이 지나고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넘치는 것은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볼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마침내 자리를 내어줄 때, 사랑은 눈부신 그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요.”

‘강단을 떠나는 노교수’라고 하기엔 중년의 기운이 더 짙은 그의 입에서 “청춘이 지난 뒤 비로소 생기는 사랑의 자리”라는 표현이 흘러나왔다. 지난달 27일 서울 연세대 알렌홀에서 열린 정년퇴임식의 주인공, 백영서(65) 연세대 사학과 교수다. 그는 최근 한 신문에 실린 ‘젊은 작가’의 칼럼 한 대목을 인용하며 “곁을 떠나기가 몹시도 아쉬운 제자들”에게 애정을 전했다. 이번달 계절학기 강의까지 채우고 대학을 떠나는 백 교수를 지난 3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32년 6개월’ 교단 퇴임…최근 연세대 특강
‘청춘 지난 뒤 진정한 사랑’ 칼럼 인용
“미·영성 관심많던 ‘나’와 화해하고파”


1974년 민청학련 수감때 ‘리영희 추천’
“박사 지도 민두기 ‘학문적 엄격성’ 배워”
“‘백낙청과 아이들’ 부담스럽지 않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중국근현대사를 전공한 그는 연구자로서 ‘동아시아론’, ‘복합국가’, ‘사회인문학’ 등의 화두를 던졌고, 교육자로서 한림대(1986~94년), 연세대(1994~2018년)에서 32년 6개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9년 편집위원부터 시작해 2006~15년 10년간 편집주간을 지낸 <창작과 비평>을 거점으로 꾸준히 학술을 통한 사회참여에도 몸담았다.

동료와 제자들은 ‘절제와 균형’ ‘엄정한 저울추’라는 말로 그의 삶과 학문을 요약한다.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소명감은 명확했지만 학내 개혁을 할 때는 공인으로서의 원칙과 절차를 중시해 무리가 없었다”(차혜원 연세대 교수) “따뜻한 성품이지만 뭔가를 지적할 땐 너무나 신랄하고 예리하다”(이욱연 서강대 교수), “사회적 이슈와 학문적 이슈의 균형을 지켰다”(정문상 가천대 교수) 같은 평가다.

백 교수는 ‘균형감’을 지니게 된 연원으로 리영희·민두기·백낙청, 세 명의 스승을 들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들어간 감옥에서 김지하 선배를 만났는데, 중국현대사를 공부하겠다고 했더니 출옥하면 리영희 선생을 꼭 만나보라고 했어요.” 그는 이후 리영희 선생 밑에서 공부하면서 <8억인과의 대화>(1977년) 집필 때 자료를 수집하는 등 ‘비제도권 조교’로서의 삶을 살았다. 두번째 스승인 민두기 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억압적인 정치 상황 때문에 서울대 대학원(석사과정)에 입학할 수 없었던 백 교수를 따로 불러 1년간 중국 역사·철학사를 지도해준 ‘독선생’이었다. “민두기 선생님으로부터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방법, 학문적인 엄격성을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기술자’는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고, 학자는 정치현실과 학문 사이에 거리를 둬야 한다고 하셨어요. 박사 논문에 (지도교수로서) 도장을 찍기 직전 저한테 다짐도 받으셨지요. ‘학위받고 나서 절대 정치하면 안된다’고.” 세번째 스승 백낙청 교수는 리영희 선생에 대한 ‘조교 백 교수’의 성실한 태도를 눈여겨보며 인연이 시작됐다. “제가 백낙청 선생의 그늘에서 벗어났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백낙청과 아이들’로 불리는 데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막스 베버, 그람시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듯 백낙청 사상을 학문적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백 선생과 함께 작업한 덕분에 학문의 현실 적응력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최원식 교수와 ‘동아시아론’을 만들었고 이를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과 결합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의 동아시아론은 근대적 국민국가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를 ‘지적 실험’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공생과 연대의 조건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동아시아는 오랫동안 세계사의 ‘주변’으로 간주됐고, 동아시아 내에서도 중심-주변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데, 이처럼 ‘이중적으로’ 주변화된 사회(또는 국가)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자기 전환, 국가간의 결합양상을 ‘복합국가’라는 틀로 설명하며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는 주요 지점을 ‘핵심현장’이라고 표현해왔다. “동아시아 핵심현장이었던 한반도에서 최근 벌어진 남북 화해 움직임은 동아시아평화공동체 구상, 복합국가 이론을 한층 발전시킬 동력을 마련해줬습니다. 세계 질서의 교체기에 늘 한반도의 역할이 중요했고 지금이야말로 한반도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역할을 해야할 시기입니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 인문한국(HK)사업단 단장, 문과대 학장 등을 지낸 백 교수는 ‘학술행정’의 어려움도 털어놓았다.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대학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하는지 제 개인적 고민과 신념은 있지만, 정부로부터 연구사업비를 따내기 위해선 타협이 불가피했어요. 가령 교육부 기준이 영문 잡지에 글을 게재하면 한글 잡지보다 세배 정도 높은 점수를 주도록 돼 있어서 저도 그런 걸 요구해야 했어요. 나머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균형을 잡아야 했지요.”

그는 이제 대학을 떠나면 “지적 긴장은 유지하되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이전, 미와 종교, 영성에 관심이 많았던 나와 화해하고 싶다”고 했다. 7년째 아모레퍼시픽이 지원하는 ‘아시안 뷰티 탐색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3년 전 ‘아시아의 미 탐험대’를 꾸린 것도 그런 맥락이다. 강태웅(일본 영상문화론)·김현미(문화인류학·여성학)·조규희(한국미술사)·최기숙(고전문학) 등으로 꾸린 ‘아시아의 미 탐험대’는 지난 2월 사랑·고독·꾸밈·성찰·수행·감각을 주제로 <아름다운 사람>(서해문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리영희재단 이사장·창비 기획편집위원장으로서 시민교육에도 집중하고 싶다는 백 교수는 내년 초 5·4운동(191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년), 천안문 사태(1989년)를 소재로 <세가지 사건으로 본 20세기 중국>을 펴낼 계획이다. “2019년에 100돌·70돌·30돌을 맞는 세 사건을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꿰보고 싶다”는 소망이다.

“앞으로 무슨 일을 직접 맡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도록 돕는 코디네이터의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청춘이 지나간 뒤 사랑의 자리’가 제가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모습입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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