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8 (목)

국민연금, 절차 안 거치고 '대한항공 개입'

댓글 6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복지부 장관, 최고 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 공식 승인 절차 없이 총수 일가 사태 해결방안 묻는 공개서한 등 주주권 행사 들어가

국민연금이 총수 일가의 갑질 논란에 휘말린 대한항공에 대해 최근 공개서한 발송 등 주주권 행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동의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연금 창립(1988년) 이후 공개서한 발송이라는 전례 없는 방식의 주주권 행사가 공식 기구의 승인을 얻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것이다.

조선일보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3차 국민연금 기금운용위 모두 발언에서 "대한항공의 2대 주주로서 (국민연금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주주권을 행사하고자 한다"며 "(주주권 행사의 방식은) 대한항공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한편 기금운용본부로 하여금 공개서한 발송, 대한항공 경영진과의 면담 등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복지부 장관은 기금운용위원장을 맡는다.

박 장관의 이 같은 언급 이후 지난 5일 기금운용위 산하 의결권전문위는 대한항공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했고, 같은 날 기금운용본부는 대한항공에 최근 사태 해결 방안 등을 묻는 공개서한을 발송했다. 박 장관 말대로 주주권 행사 절차가 이뤄진 것이다. 복지부는 "기금운용위 동의를 얻었기 때문에 스튜어드십 코드(기관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이전이라도 조치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본지 취재 결과 박 장관은 모두 발언에서만 주주권 행사를 언급했을 뿐 기금운용위 정식 동의는 얻지 않았다. 당시 기금운용위 위원들은 회의 중간에 대한항공과 관련해 두 장짜리 보고서를 받았다. 지난 4월 기금운용위 2차 회의 당시 한 위원이 "대한항공이나 삼성증권과 관련해 국민연금이 실제로 어떤 피해를 본 것인지,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기 이전이라도 (국민연금이) 할 수 있는 조치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보고해 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위원들은 관련 보고서를 회람한 뒤 반환했고 이어서 나머지 의사 일정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장관이 제안한 대로 대한항공에 대해 공개서한 발송 등 실제로 주주권을 행사할지에 대한 논의는 이날 예정됐던 각각 두 건의 의결·보고 안건 처리가 모두 종료된 이후에 이뤄졌다. 하지만 주주권 행사에 대한 공식 의결은 물론 정식으로 위원들의 동의를 얻는 절차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애초 예정된 안건이 모두 처리된 뒤여서 이미 자리를 떠난 위원도 있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회의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려면 안건을 상정하고 의결했어야 한다"면서 "그런 절차 없이도 (대한항공에 대한 의사 결정이) 효력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박 장관이 주주권 행사와 관련해) 모두 발언을 했기 때문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 반드시 안건을 올려 의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연금 전문가인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는 "대한항공 사태와 관련해 정식 판결은 물론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라 국민연금이 (공개서한 발송 같은) 주주권을 행사하기엔 몹시 민감한 상황"이라며 "특히 (기금운용위) 정식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은 재직 중인 지난 2015년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안건을 의결권전문위가 아닌 내부투자위에서 다루게 하고,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박한 혐의로 1·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번에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에 대해 적용한 공개서한 발송 등의 주주권 행사는 지난 4월 국민연금이 제출받은 스튜어드십 코드 용역보고서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복지부는 "(용역보고서는) 참고 사항일 뿐 자체적으로 최종안을 만들어 시행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이번 대한항공 사태 등을 들어 "보고서가 가이드라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김재곤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