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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무질서가 곧 자유…눈 감고 자연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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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대화'


추상화 대가 오수환 작가(72·사진)는 10년째 하루 4시간씩 걷는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자택에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가나아뜰리에(작업실)까지 걸어서 2시간 거리를 왕복한다.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오 작가는 "미련하게 늘 걸어다닌다. 인생이라는 게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보내나, 저렇게 보내나 별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뭔가에 얽매이지 않은 삶은 그림에도 드러난다. 화폭에서 오방색이 자유롭게 얽혀 있다. 황·청·백·적·흑색이 숲을 이루기도 하고, 기하학적 형태와 기호를 만들기도 한다. 사각형과 원 등 도형은 이번 전시에 처음 등장했다. 무엇을 뜻할까. 오 작가는 "도형에도 기호에도 의미가 없다. 평생 시계를 차 본 적도 없고 자동차 운전도 안 해봐서 기호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답했다.

"질서가 없는 작업이에요. 꾸미지 않고 무작위, 무위자연을 표현했죠. 화면 전체가 이완돼 있고 긴장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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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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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성보다는 감각에 의지해 그린 추상화 30여 점으로 개인전 '대화'를 7월 15일까지 연다. 색채를 절제하던 전작들과는 달리 오방색을 원 없이 풀어놨다.

"그림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이루고 싶었어요. 그냥 순수하게 색채의 리듬을 보여주려고 했죠. 사회 규범과 욕망에 얽매인 현대인들이 내 작품과 감각적으로 소통하고 잠시나마 여유를 느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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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오 작가는 황폐한 세상에서 화가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그 답이 회화의 순수성이다. 이번 전시작 '대화' 시리즈는 인간의 지식이 없는 상태, 착하고 천진스러운 자연, 원시에 가까운 고대문명을 화폭에 구현했다. 무의식과 감각을 살리기 위해 눈을 감고 그리고 물감을 뿌리기도 한다.

"우연성을 화면에 도입해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이 90%예요. 의식만 가지고 자연을 표현할 수 없죠. 자연은 우리의 고향이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죠."

어떻게 하면 깊고 넓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문학과 철학, 고대문명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플라톤, 니체, 하이데거, 베르그송,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등 철학자들과 제임스 조이스 소설 '율리시스', 중국 시인 이백, 소동파, 황정견 등의 영향을 받았다.

"미술과 철학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가요. 철학적 사고 바탕을 옆구리에 끼고 있으면 도움을 많이 받죠. 중국 한시에는 인생이 있어요. 1980~1990년대 '곡신' 시리즈가 황정견 시를 읽으면서 진행한 작업이죠. '율리시스' 형식을 그림에 구현할 방법도 고민하고 있어요."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등에서 하루 종일 고대 유물을 스케치를 하면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고대의 심성을 보고 싶어 박물관에 가요. 제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원시 사회예요. 청동기 이전 사회가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사회가 아닐까요. 아무 거리낌 없이 몇 가구가 모여 물고기 잡아먹고 사냥하면서 살았죠. 인간의 착한 심성을 보고 싶어 머리맡에 고대 동굴벽화 사진을 놓고 자요."

40여 년 화업을 이어온 그는 손주들의 드로잉을 수시로 들여다본다. 동심이 그의 작품에 묻어나오길 바래서다. 오 작가는 "내 그림은 아직 정착을 못하고 떠돌고 있다. 어차피 인생은 지우고 떠나는 것이라 지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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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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