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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영광과 오욕의 한국현대사를 체현’···JP의 파란만장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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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는 영광과 오욕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체현한 인물이었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하면서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해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산업화와 유신 체제 공고화에 기여했다. 1990년 ‘구국의 결단’이라는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만들었고, 1997년에는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DJP 연합’으로 정권 교체에 일조하기도 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를 이끌면서 ‘충청권 맹주’를 자임한 김 전 총리는 카멜레온 같은 변신의 마술사였다. 숱한 정치적 곡절을 겪으면서 정치적 생명력이 끝났는가 하면, 어느 날 최고권력의 옆자리에 다시 나타나는 능수능란함을 발휘했다. 그래서 ‘영원한 2인자’ ‘풍운아’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독재 정권에 부역했고, 지역갈등을 조장했으며. 권력형 부정비리의 원조라는 부정적인 평가 또한 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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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 육사, 그리고 박정희의 조카사위

김 전 총리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김 전 총리는 1926년 1월7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상배는 규암면 면장을 지낸 지역 유지였고, 그로부터 붓글씨를 배웠다. 공주중·고를 졸업한 뒤 일본 주오대(中央大)에 들어갔으나 곧 중퇴,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사범학교 졸업 후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로 발령났지만 2개월 만에 그만두고 경성제대(서울대의 전신) 사범대에 입학, 그해 광복을 맞았다.

1948년 3월 육군에 입대했으나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탈영했다가 일주일 만에 자수해 재입대했다. 육군사관학교 기관병으로 복무하다 1949년 1월 육사 제8기생으로 입교, 그해 5월 소위로 임관했다. 이때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받았는데, 이곳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를 인연으로 1951년 박 전 대통령의 질녀인 박영옥과 결혼했다. 박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라는 위치는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그가 부침(浮沈)을 거듭한 연유가 되기도 했다.

1950년 육군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1951년 제1차 유학장교단으로 도미해 미 육군보병학교를 수료했다. 1952년 귀국해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 반장(소령)을 맡았고, 1958년 육본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이 됐다. 주로 정보계통에 근무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김 전 총리는 4·19 혁명 후인 1960년 5월 육사 8기 동기생들과 함께 숙군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상부에 제출하려다 발각돼 국가반란음모 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났다. 1961년 2월에도 ‘16인 하극상 사건’의 배후 주모자로 지목돼 구속됐다가 수일 만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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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권력의 2인자, 끝없는 부침

김 전 총리는 35세때인 1961년 박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깊숙이 참가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자칭 혁명공약은 물론 혁명 후 군사정부 체계와 사업, 민정이양 스케줄, 정치·사회개혁 등의 계획서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같은 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창설을 주도하고 1963년까지 초대부장으로 재임하면서 ‘권력의 2인자’로 떠올랐다. 중정부장 재임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에 특사로 파견돼 ‘김·오히라(大平) 메모’를 통해 한·일회담을 매듭짓기도 했다.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지만 ‘혁명 동기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장을 사임하고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 8개월 후 귀국한 그는 1963년 12월 고향인 충남 부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16대까지 9선을 기록한 선량(善良)의 첫 단추를 끼웠다. 공화당 의장까지 꿰차면서 잘 나가던 그는 ‘김·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 사태까지 일어나자 2차 외유를 떠났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으나 1968년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고 ‘김종필 대안론’을 들고 나온 괴문서가 발견된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그는 1971년 국무총리에 기용되면서 또다시 2인자로 ‘컴백’했다. 만 4년8개월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으로 있었지만 박 전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1975년 12월 전격 경질된다. 절치부심하던 그는 1979년 10·26 직후 공화당 총재에 선출되면서 드디어 ‘1인자’의 자리에 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또다시 시련을 안겨줬다. 김 전 총리는 1979년 12·12사태와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신군부에 의해 부패정치인으로 낙인 찍혀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채 야인생활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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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과 DJP 연합에도 못이룬 내각제 꿈

김 전 총리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그 해 대선에 김영삼·김대중과 함께 출마,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 새로운 출발을 노렸다. 1988년 13대 총선때 신민주공화당으로 충청권을 석권했지만, 총 35석의 원내 제4당에 머물렀다.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3당 합당’ 카드를 받아들였다. 1990년 1월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과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면서 공화계 대표로 최고위원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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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인자’로 자족한 그에게는 ‘토사구팽’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권을 잡은 김영삼 대통령이 3당 합당 당시 약속을 저버리고 오히려 자신을 출당할 움직임을 보이자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한 그는 ‘충청 핫바지론으로 1996년 15대 총선에서 50석을 얻었다.

이후 김 전 총리는 또다시 ‘킹케이커’로 나섰다. 이번에도 내각제가 고리였다. 1997년 11월 새정치국민회의와 집권 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 후보로의 대선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1998년 김 대통령 당선으로 ‘DJ 대통령, JP 총리’ 체제의 공동정권이 이뤄졌다. 유신 정권, 민자당 정권에 이어 또다시 집권여당의 실권자로 변신한 것이다. 공동정권의 2인자로 ‘실세 총리’를 역임한 그는 2000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나 자민련 총재로 복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 실시된 제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김대중 정부와도 내각제 개헌, 대북 문제 등으로 갈등을 거듭하다가 2001년 9월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을 계기로 결별했다. 그가 평생의 과제로 여겨져 온 ‘내각제’는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번번이 휴지조각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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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던 노정객의 퇴장

16대 총선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한 충청권은 김 전 총리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하고 소속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한데 이어 그해 16대 대선에서 충청권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운 민주당에 텃밭을 잠식당하면서 충청권 맹주로서의 위상이 크게 약화됐다.

2004년 총선에서 재기를 노리던 그에게 대통령 탄핵 역풍은 치명타였다. 총선 결과 충남지역 4석이라는 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데다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조차 낙선했다. 김 전 총리는 결국 그해 4월19일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그는 내각제 관철이라는 평생의 꿈을 펴보지 못한 채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 됐다”고 술회하는 것으로 파란만장했던 43년 정치인생을 접었다. 2004년 6월에는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삼성그룹에서 15억원 상당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충청권 지역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만들어졌지만 김 전 총리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선 한나라당 후보인 이명박을 지지했다.

그는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입원했다. 이후 재활운동을 통해 2010년 거의 몸을 회복했지만 공식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다.

2013년 12월10일 김 전 총리는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 창립식에 참석하면서 5년만에 국회를 찾았다. 검은 선글라스에 휠체어를 탄 모습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배가 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는가”라고 했다.

김 전 총리는 2015년 2월22일 부인 고 박영옥 여사 빈소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정치는 잘하면 국민이 그 열매를 따먹지만 정치인 본인에게는 허업”이라며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지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면 교도소 밖에 갈 데가 없다”고 했다. “지기 전에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던 노(老) 보수정객의 사실상 마지막 발언이었다.

<김진우 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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