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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배척하고 공격하고 모욕하는 세 가지 삶…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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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소설가 토마스 멜레의 논픽션 '등 뒤의 세상'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조울증을 앓는 사람의 삶보다 더 수치심에 점령된 삶은 거의 생각하기 힘들다. 그건 그 사람이 서로 배척하고 공격하고 모욕하는 세 가지 삶을 살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의 삶, 조증 환자의 삶, 그리고 잠시 치유된 사람의 삶이다."

독일 소설가 토마스 멜레의 신간 '등 뒤의 세상'(Die Welt im Rucken·그러나 펴냄)은 흔히 조울증이라 부르는 '양극성 장애'와의 싸움에 대한 수기(手記)다.

하지만 흡인력 있는 문장들은 소설에 가깝다.

연합뉴스

등 뒤의 세상




날카로운 묘사는 질병에 의해 파헤쳐지는 인간의 내면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비춰 보인다.

조증이 일어날 때는 세상의 중심이 '그'다. 모든 노래의 가사가 그를 겨냥해 만들어졌으며, 모든 간판이 그를 향해 얘기하고, 길거리 모든 사람이 그를 주목한다. 마돈나와 섹스를 하고 죽은 푸코가 살아 돌아오고, 커트 코베인이 환생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어찔할 수 없는 기행을 벌이고 결국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반대로 우울증이 발생할 때는 죽기 위해 수면제를 모으며 그저 방에 누워 죽기만을 기다린다.

흔히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얘기하듯, 조증이 높게 가면 우울증도 깊고 조증이 얕으면 우울증도 얕게 온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1999년, 2006년, 2010년 세 차례 조울증이 발병했고 그로 인해 경제적 기반과 인간관계, 수많은 장서와 음반까지 잃어버렸다고 한다. 양극성 장애가 6년 세월을 훔쳐갔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질병은 평생을 가는, 그래서 다시 발병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천형(天刑)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저자는 1975년 독일 본에서 태어나 독일과 미국에서 비교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2011년 소설 '식스터(Sickster)'로 데뷔했다. 2015년 베를린 예술상을 받았으며, '등 뒤의 세상'은 2016년 독일에서 출간돼 독일 도서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

책은 주한독일문화원과 한국 머크사 협력한 '소셜번역 프로젝트' 지원을 받아 아시아 10개국 언어로 번역되는 첫 작품이다. 소셜번역 프로젝트는 작품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고자 작가와 번역자가 긴밀히 소통하며 번역 작업을 하는 프로젝트다.

심리학과 인지과학 발전에 힘입어 인간 의식과 무의식을 가린 베일이 한 겹씩 벗겨지고 있다. 그럴수록 과거 명확했던 정상과 비정상, 광기는 갈수록 경계가 모호해진다.

양극성 장애와 창의력의 상관관계를 다룬 책도 많다. 실제로 유명한 예술가 중에는 조울증을 앓거나 앓았던 이가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조울증이 단지 네안데르탈인이 물려준 유전 형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에겐 위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이 질병을 앓는다고 우쭐해 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이 병은 매번 나를 당혹감과 소외감과 수치심으로 가득 채운다."

책은 자신의 정상성을 의심하게 하는 어떤 결핍이 정상성의 토대가 된다는 역설을 일깨운다. 자신의 정상성을 진지하게 의심하는 나와 공명한다.

이기숙 옮김. 392쪽. 1만6천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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