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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허스토리' 김해숙, "촬영 끝나고 통곡…처절했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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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인터뷰] 김해숙이 밝히는 '허스토리' 생존기

"더 처절한 역할 내게 오더라도 두려움 없어야죠"

CBS노컷뉴스 유원정 기자

노컷뉴스

영화 '허스토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배정길 역을 연기한 배우 김해숙이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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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해숙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디에나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배우일 것이다. 어떤 작은 역할을 맡아도 그 존재감이 뚜렷하고, 호흡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그런 김해숙에게 '허스토리'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배정길 역은 배우로서 다시 하기 힘든 도전이었다. 자신의 배우 경력으로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비극을 체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깊이를 알 수 없고, 어느 정도까지인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떻게 풀어내야 할 지 상상이 가지 않았어요. 다른 영화는 제가 욕을 먹으면 되는데 이건 그 분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제일 무서웠거든요. 차라리 외적으로 변화를 줘서 뭔가 달라질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는데 그림을 아무리 그려도 외형이나 내면이나 보이지 않는 그림이었어요."

겪으면 겪을 수록 김해숙에게는 이 작업에 참여하고자 했던 자신의 뜻이 혹시 '교만'이 아닌가 싶었다고. 그는 배우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분들이 이런 아픔을 겪으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걸 재조명할 수 있는 영화잖아요. 내 나이에, 이렇게 배우로서 사랑을 받는 위치에서 해야 하는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연기적으로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교만한 게 아니었나 싶어요. 배우로 접근해도, 인간 김해숙으로 접근해도 안되는 거라서, 여기 왜 뛰어들었는지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고…. 어렵고, 무섭고, 도망치고 싶더라고요."

영화 속 배정길이라는 인물은 감정의 폭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무뚝뚝한 표정에는 환한 웃음이나, 애절한 눈물을 보기 힘들다.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이 희로애락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샘조차 말라버리게 한 것이다.

"이 인물이 힘들었던 이유는 아픔 속에 또 자신만의 아픔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람이 너무 큰 일을 겪으면 이 세상의 모든 감정이나 느낌이 덧없어지거든요. 어떤 대사나 행동으로 표현할 수가 없고, 눈물이 말라버릴 정도면 세상을 다 살았다는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수많은 연기를 했는데 울 수 없는 게 고통스러운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네요. 촬영 끝나고 울었던 적도 너무 많아요. 재판 장면에서도 '컷' 하자마자 엎드려서 엉엉 울었어요. 항상 뭐가 가슴에 맺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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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배정길 역을 연기한 배우 김해숙이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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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참여했던 누구나 자신만의 무게를 짊어지고, 정신력으로 버텨내야 했다. 촬영보다는 어쩌면 '처절한' 생존기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현장은 언제나 배우들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특이한 현장이었어요. 누가 누굴 돕고, 배우고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각자 맡은 역할에 책임감을 가지고 소화하느라 치열했거든요. 별로 이야기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이에 관계없이 배우고 느꼈던 거 같아요.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웠어요. 정말 고생스럽고, 힘들었고,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데 오랜만에 배우들의 열정이 느껴지는 순수한 순간이었거든요. 영화 속에서처럼 '국가대표' 이런 느낌보다는 그냥 처절했던 것 같아요."

김해숙은 배우라면 응당 가질 수밖에 없는 욕심까지 모두 내려놓았다. 자신의 감정에 빠지는 것을 항상 경계했고, 동시에 온전한 배정길에 가까워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비단 김해숙 뿐만이 아니라 영화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이러했을 것이다.

"사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곧 슬픔이었으면 했어요. 관객들과 할머니들의 감정을 같이 나눠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배우들의 욕심이 장면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이 분(배정길)의 감정에는 제가 들어가면 안되고, 제가 해석하거나 느끼면 안되는 거죠. 철저히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내 감정으로 연기하는 걸 깨부수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죠. 배우마다 지향하는 연기론이 있는데 저는 철저히 그 사람이 되고자 해요. 그렇게 가다보면 '이 사람이 이랬을 것'이라는 확신이 가는 때가 있거든요. 그게 오히려 위험한 자기 함정의 순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스스로를 없애고 완전히 그 인물이 되고자 했지만 이번에는 더욱 일상으로 돌아오기가 힘들었다. 또 다른 작품을 촬영해도 잊을 수가 없어, 결국 김해숙은 13일 동안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행을 다녀왔다. 이제 그는 수많은 이들의 고뇌와 진통 끝에 태어난 '허스토리'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연기 잘했다'는 칭찬보다는 '참 애썼고, 고생했다'는 위로가 어울리는 영화. 김해숙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허스토리'가 그렇게 남으리라 예측했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면 많은 분들이 보셔서 알고 가시길 바랐어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함께 전해지길 바랐고요. 영화 속 할머니들의 용기와 마음을 함께 나눠가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생존해 계신 분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이것이 정말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작은 위안이 아닌가 싶었어요. 영화 속에 순수하게 장난치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 분들이 정말 어디 멀리 계신 분들이 아니라 우리 이웃이고, 우리 가까이에 계시거든요. 저는 우리가 이 분들과 더 가까워지고, 그 마음을 나누고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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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배정길 역을 연기한 배우 김해숙이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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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못할 것처럼 힘들었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든 역할이 들어와도 김해숙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 역할 불문, 장르 불문, 연기에 대해서라면 가리는 것 없이 모두 소화 가능하다.

"뭔가 새로운 게 나오면 흥분돼요. 배우로서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그렇거든요. 역할의 크고 작음이나 장르는 관계가 없어요. 많은 분들이 저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건강하게, 열심히 활동하고 있죠. 액션물도 괜찮은데 나이가 있으니 지시 내리는 역의 높은 사람을 하는 게 좋을 거 같고…. (웃음) 순간집중력이 좋아서 아직 대사도 잘 외우는데 일상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하는 게 없네요. 더 처절한 역할이 올 수도 있겠지만 배우라는 건 확정되거나 한정되면 안되거든요. 언제 어떤 역할이 어떤 모습으로 와도 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사실 김해숙 또래의 여성 배우들이 영화에서 '어머니' 외의 존재감있는 역할을 맡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이다. 김해숙은 젊은 시절, 연기를 하며 자신이 듣고 자랐던 한 마디를 떠올렸다.

"지금은 영화판 자체가 남성 위주이지만 세상은 변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허스토리' 같은 영화도 나온 게 아닐까요. 인생의 법칙이 저는 영화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낙천적으로 모든 걸 좋게 보려는 생각도 있지만요. 연기는 기다림의 예술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이걸 듣고 살아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해요. 영화에도 점점 여성 캐릭터들이 많아지고 있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남자들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죠."

배우가 아닌 인간 김해숙을 다시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낙천적인 유쾌함이다. 시원한 웃음과 자연스러운 입담 속에서 김해숙이 가진 충실한 삶의 궤적을 엿본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세월은 흐르는 거고 멈출 수 없잖아요. 저는 그 흐름에 맞춰가야지 역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제 욕심을 부릴 때가 많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현재에 충실히, 열심히 살면서 흐름에 맡겨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너무 깊게 생각하거나 기대하면 내 생각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는 거 같아요. 내가 어떻게 못하는 건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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