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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트럼프에 흔들리는 국제기구…유엔 역할 제한, WTO는 무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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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주요 국제 기구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국제기구의 역할에 대해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 주도로 설립됐던 국제기구들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으로 빛을 잃어가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유네스코(UNESCO·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를 탈퇴한 데 이어 19일 유엔인권이사회 탈퇴를 결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 각국을 상대로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도 세계무역기구(WTO)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다. 프랑스, 독일 등을 중심으로 국제기구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미국, 유네스코 이어 유엔인권이사회 탈퇴…유엔 역할 제한되나

조선일보

니키 헤일리(왼쪽) 유엔주재 미국대사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은 19일 미 국무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엔인권이사회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폼페이오 트위터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이날 미 국무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엔인권이사회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헤일리 대사는 미국의 탈퇴 이유로 유엔인권이사회가 비인도주의적 회원국들을 이사회에서 제명하지 않았고, 반(反)이스라엘 성향을 지속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지난해 유네스코를 탈퇴할 때도 반이스라엘적 편견을 지적했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유엔인권위원회를 개편, 발전시켜 지난 2006년 설립된 유엔 산하 기구다. 47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미국은 버락 오바마 정부가 출범하고 지난 2009년 유엔인권이사회에 합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계속해서 유엔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유엔의 2018~2019년도 예산은 전년 대비 2억8500만달러 줄어든 53억9600만 달러로 책정됐다. 미국이 분담금을 감축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2016~2017년도 유엔 분담금의 22%를 부담했다.

헤일리 대사는 유엔 예산이 책정된 뒤 성명을 내고 “더 이상 미국인의 관용을 이용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유엔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방향을 계속 찾겠다”고 해 추가 분담금 삭감을 예고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는 유엔의 역할을 제한할 수 있다는 국제 사회의 우려를 낳았다. 국제 인권 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의 루이스 샤르보노 유엔 담당자는 유엔 예산 삭감 소식에 “유엔의 효율성을 높이고 낭비되는 부문을 제거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며 “그러나 인권 침해를 감시, 조사하고 폭로하며, 전 세계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유엔의 능력은 축소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대변인은 이날 “유엔은 미국이 이사회에 남아있길 바란다”며 “유엔의 인권 구호는 전 세계적인 인권 증진과 보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탈퇴) 결정은 미국의 국가 안보와 외교 정책에 역효과를 주고, 전 세계 학대 피해자 구호 활동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미국이 유엔을 계속 압박하는 것은 결국 미국에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리처드 고완 유럽외교협회(ECFR) 연구원은 “유엔은 미국과 무기력한 대립을 계속할 수 없다”며 “유엔은 재정적, 정치적 원조가 가능한 다른 권력자들에게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이 러시아와 중국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 트럼프 행정부, 안보 이유로 WTO와 대립…‘WTO 무용론’도 나와

트럼프 행정부의 영향을 받은 국제 기구는 유엔 뿐만이 아니다. WTO는 미국이 일방적인 관세 폭탄을 퍼부어 글로벌 무역 전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무용론에 휩싸였다. 지안마르코 오타비아노 보코니대학 교수는 “지금 미국이 무역 상대국과 추진하는 협상들은 WTO의 신뢰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며 “WTO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1955년 설립된 WTO는 미국이 주도한 다자간 무역체제로, 미국은 그 동안 WTO의 실질적 리더로 역할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자국의 ‘무역확장법 232조’를 내세워 세계 각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수입 상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 수입을 제한하는 규정으로, WTO는 국가 안보와 관련해서 협정 내용과 무관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예외를 뒀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안보 문제를 이유로 WTO를 무력화하고, 글로벌 무역 전쟁을 촉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WTO에 부정적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출연한 NBC방송에서 진행자가 “국외로 나간 미국 기업의 제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은 WTO가 쉽게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자 “문제 없다. WTO가 방해하면 재협상을 하거나 탈퇴할 것이다. WTO는 재앙이다”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계속해서 WTO에 불만을 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WTO가 중국의 편을 들고 있다며,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위터에 “WTO는 엄청난 경제 대국인 중국을 개발도상국으로 생각한다”며 “이에 중국은 특히 미국에 비해 큰 이득을 얻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이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WTO는 미국에 공정하지 않다”고 했다.

리카르도 라미레스 에르난데스 WTO 상소기구 전 위원은 지난달 WTO 본부에서 열린 고별 연설에서 “WTO는 서서히 목이 졸려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사실상 WTO의 분쟁 조정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WTO는 설립 이후 국제 무역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WTO 내 분쟁해결 기구인 상소기구는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위원은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선임한다. 무역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최소 3명의 위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상소 위원 중 3명은 임기가 만료됐고, 남은 4명 중 2명도 내년에 임기가 만료된다. 당장 내년부터 WTO의 분쟁 조정 기능이 상실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WTO가 미국에 불공정한 판정을 내렸다는 이유로 위원을 선임하는 절차 진행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은 WTO 개편을 추진하고 나섰다. 로이터는 이날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상들은 다음주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자유 무역과 공정무역을 보장하고, 세계 무역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WTO 개혁 추진을 협의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연설에서 “일방적인 접근과 무역전쟁의 위협으로는 심각한 세계 무역 불균형을 해결할 수 없다”며 “세계 무역이 직면한 도전에는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 WTO 개혁이 답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선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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