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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판다④] '팀장님'과 '여승무원'…'한 기차 두 업무'는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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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KTX 해고 여승무원들.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대법원 안에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1995년 서울 서초동에 대법원 건물이 지어진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푸른색 조끼를 입고 대법정 앞에서 “대법원이 청와대와의 거래를 위해 우리에게 부당한 선고를 내렸다”며 항의한 이들은, 전직 KTX 여승무원들이었습니다.

전직 ‘KTX 여승무원’이라고 표현하긴 했습니다만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이들은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의 근로자가 아닙니다. 2006년 해고된 승무원들은 이 문제로 3년을 길에서, 8년을 법정에서 싸웠습니다. “우리가 코레일의 근로자임을 확인해 달라”며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을 낸 겁니다. 코레일은 “우리 유관회사나 자회사의 근로자이지, 우리 근로자가 아니다”며 맞섰습니다. “코레일의 근로자가 맞다”고 본 하급심 판사들도 있었지만 대법관들은 2015년 2월 코레일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재판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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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열차.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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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묻혔던 재판 결과는 지난달 25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2015년 7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의 독대를 앞두고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현안 관련 말씀 자료(대외비)‘란 문건을 공개하면서 다시 들춰지기 시작됐습니다.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음'이라는 설명과 함께 16건의 판결이 사례로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KTX 여승무원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특히 논란이 된 것은 1‧2심까지 이어지던 흐름과 3심(대법원)의 결론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본 소송 전부터 가처분‧가처분이의‧업무방해 형사사건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적지 않은 판사들이 “승무원들은 코레일의 근로자가 맞다”고 봤습니다. “승무원들이 불법시위로 코레일의 업무를 방해했다”며 승무지부장에게 유죄를 선고(서울중앙지법, 2007년 12월)하고, “승무원들은 코레일 사업장에서 퇴거하고 업무를 그만 방해하라”는 가처분 결정(서울고법, 2008년 4월)을 내리는 가운데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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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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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전’에서 예고된 승무원들의 승리는 ‘본선’에서도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은 2008년 11월에 시작된 것과 2009년 1월에 시작된 것이 있습니다. 1차에 참여하지 못한 승무원들이 석 달 뒤 따로 소송을 냈고, 각기 재판이 진행됐습니다. 2011년 8월 1차 소송은 2심까지, 2차 소송은 1심까지 선고가 나왔는데 모두 승무원들이 이겼습니다.

하지만 2012년 10월 2차 소송 2심이 원심을 깨고 코레일의 손을 들어주면서 전세가 역전됩니다. 대법원은 2015년 2월 두 사건을 한꺼번에 “승무원들은 KTX의 근로자가 아니다”고 정리합니다. “열차팀장의 업무와 KTX 여승무원의 업무가 넓게는 KTX 차량이라는 동일한 공간 내에서 수행되고 서로 협조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각 업무의 내용이나 영역은 구분되어 있었다”는 이유에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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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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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팀장은 코레일 소속 정규직 근로자입니다. 여승무원들은 코레일과 위탁계약을 맺은 유관회사나 자회사와 계약서를 쓴 비정규직 근로자입니다. 열차팀장과 여승무원은 KTX라는 한 공간에서 일을 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비슷한 일을 했거나, 여승무원이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일을 했다면 코레일이 한 일은 위장도급이 됩니다. 열차팀장처럼 정식으로 고용한 근로자에게 시켜야 하는 일인데도 자회사를 끼워 도급 형태만 취하고 사실상 고용한것이나 다름없이 일을 시킨 것이니까요.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내 일 네 일’ 구분해 ‘소 닭 보듯’ 일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도급이란 어떤 일을 ‘똑 떼어’ 그 일을 완성해서 달라고 맡기는 일입니다. 코레일은 KTX 열차 안에서의 일을 ‘안전부분’과 ‘승객서비스’로 쪼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안전업무는 코레일이 직접 고용한 열차팀장에게 시키고, 승객서비스 업무는 유관회사인 '홍익회'나 자회사인 '철도유통'에 위탁해 완성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승무원들은 코레일이 아닌, 홍익회나 철도유통이 지휘‧감독하고 월급도 주는 그들의 근로자이기 때문에 코레일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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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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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선고된 1심은, 열차팀장과 여승무원들이 따로 일한 게 아니라고 봤습니다.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은 모든 ‘KTX 여승무원들의 승객서비스 업무 수행’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업무 평가’를 실시했다”면서, 열차팀장이 여승무원들의 사실상 상사였다고 본 겁니다. 제대로 된 도급계약이라면 이런 일은 열차팀장이 아니라 “위탁계약상 KTX 여승무원들에 대한 감독업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는 철도유통 소속 고속열차 승무사무소장이 해야 하는 일인데, 승무사무소장은 “필요한 경우 몇몇 KTX 열차에만 승차하였을 뿐 대부분의 KTX 열차에 승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심 재판부는 또 ‘안전은 팀장이, 서비스는 승무원이 했다'는 코레일의 주장과 달리 승무원이 안전 업무를 담당했음을 중요하게 봤습니다. “철도유통과의 근로계약서상 KTX 여승무원은 열차 내에서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을 보조하며 일하도록 돼 있고, 특히 열차화재‧공중 사상사고 등 이례적 상황 발생시 KTX 여승무원은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화재진압 및 승객대피·보호 등에 참여하고, 공안원이 승무하지 않았을 경우 열차운행업무까지도 인계받도록 되어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KTX 여승무원의 업무는 코레일이 열차팀장을 통해 담당하는 안전 부분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2011년 8월 서울고법에서 선고된 2심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코레일이 맡긴 KTX여승무원 업무는, 코레일의 일 중 일부를 횡적 단면으로 분리해 코레일과 무관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코레일의 서비스업무를 인위적으로 종적 단면으로 구분해 코레일 직원인 열차팀장과 KTX 여승무원의 역할분담만을 분리하고자 한 것”이라면서 “승객서비스 업무의 성질상 열차팀장과 KTX 여승무원은 열차팀장의 지시, 감독권 유무와 관계없이 상호 공동업무수행자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애초에 분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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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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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5년 2월, 대법원은 이같은 1‧2심을 뒤집습니다. “열차팀장이 KTX 차량 전부를 순회‧감시하면서 안전업무를 수행한 것과 비교해 여승무원은 이와 별도로 각 담당 구간을 순회하면서 승객 응대 등의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화재 등의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KTX 여승무원도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화재진압 및 승객대피 등의 활동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이는 이례적인 상황에서 응당 필요한 조치에 불과하고 KTX 여승무원의 고유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았다”고 봤습니다. 열차팀장과 승무원의 일은 분리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분리해서 일했으며, 가끔 함께 일해야 할 때가 있지만 정말 가끔이기 때문에 주 업무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승무원들은 ‘홍익회’라는 코레일 유관회사나 ‘철도유통’이라는 코레일 자회사와 근로계약서를 쓰긴 했지만 자신들은 코레일의 근로자이거나 곧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계약서엔 ‘철도청(코레일의 전신) 준공무원 대우’ 조건이 있었고, 말뿐이었지만 ‘1년 뒤 공사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았다고 주장합니다. 2004년 13:1, 2005년 136:1의 경쟁률을 뚫고 ‘선로 위의 스튜어디스’ ‘KTX의 꽃’이란 이름으로 ‘내나라여행박람회’ ‘정부혁신국제박람회’ ‘추석고객서비스행사’ 등 코레일 행사에 동원돼 일했던 것은 그 때문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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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KTX 여승무원 신입사원 면접시험 응시생들. 신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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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KTX 여승무원들. 김성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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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고양고속철 기지창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KTX 예비 승무원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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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판결을 두고 당시에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승길 아주대 법학전문대 교수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사내도급 업무수행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요소들, 즉 ‘혼재’라는 징표의 외관 너머에 있는 실체적 사실에 주목해 '장소적 혼재'에도 불구하고 '업무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해 업무도 도급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산업관계연구, 2015년 12월)"고 봤습니다.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노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계약을 근로계약이 아니라 도급계약으로 정의하는 것은 200년 전의 관념으로 되돌아가는 결과가 될 것(한국노동연구원 노동판례리뷰, 2013년 2월)"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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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KTX 해고승무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수사와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 요청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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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된 '전직 KTX 여승무원'들은 지난달 30일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만났습니다. 이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를 위해 공정하지 못한 선고를 내렸으니, 지금 대법원장이 나서 이를 바로잡아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재심이 가능할지는 불투명합니다. 문제의 대외비 말씀자료는 대법원의 KTX 선고 이전이 아닌 이후에 작성됐기 때문에 '재판 거래'가 사실로 드러나려면 근거가 더 필요합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해 수사를 하게 됩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 15일 "섣불리 고발이나 수사 의뢰와 같은 조치를 할 수는 없더라도 이미 이뤄진 고발에 따라 수사가 진행될 경우 협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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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서울역에서 'KTX 해고승무원 문제 해결을 위한 기자회견을 마치고 청와대로 행진을 마친 한 참가자가 목을 축이고 있다. 이날 KTX 해고 승무원들은 서울역에서 해고승무원 전원복직과 승무업무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대통령 면담 요청서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연합뉴스]



KTX 여승무원들이 코레일의 근로자냐 아니냐의 문제는 KTX를 타는 모두가 한번쯤 생각해봄직한 문제일 것입니다. '안전'과 '서비스'가 모두 KTX 탑승객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KTX열차에는 열차팀장 1명과 여승무원 2명이 탑니다. 안전을 열차팀장 1명이 전담하고 여승무원은 서비스만을 전담해 각각 따로 일하는 것과, 세 사람이 지휘·협력 관계로 일하며 안전과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좋을까요? 법적 판단의 영역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지만 탑승객에게 이익이 되는 쪽이 어딘지 곰곰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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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는 ‘판결 다시보기’의 줄임말입니다. 중앙일보 법조팀에서 이슈가 된 판결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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