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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진숙의 휴먼 갤러리] (1)빛나는 옷의 배신자, 그를 보는 예수의 눈빛은 정의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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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 ‘유다의 입맞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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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이진숙이 그림을 매주 한 편씩 선정해, 각 그림에 담긴 인간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삶의 문제를 함께 들여다본다. ‘그림 보는 법’도 소개하는 이 연재는 독자들에게 각자의 그림 안목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배신의 입맞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제목의 책이 한때 유행했다. 21세기에 정의는 단순히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성원 개개인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서 개인의 물질적 생존과 정서적 생존(자존감)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중세적 신분제가 붕괴하고 근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개인(Individual)’의 등장과 더불어 ‘정의’는 중요한 문제가 되어갔다. 자본주의 태동기이자, 아직 인간들의 활동이 종교의 외피에 싸여 있던 시절, 14세기의 문을 연 조토(Giotto di Bondone·1267년경~1337)의 그림에는 ‘정의’에 대한 소박하고도 확고한 생각이 담겨 있다.

예수는 체포됐다. 어둠을 뚫고 한 무리 사람들이 횃불과 창을 들고 몰려 왔다. 적의에 들끓는 시끌벅적한 무리의 앞장을 선 자는 노란 옷의 유다다. 유다는 예수를 감싸 안고 입을 맞추려 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예수의 뒤쪽에 후광을 입은 베드로가 있다. 그는 칼을 꺼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고 있다.

유다가 입을 맞추려 한 사건은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에, 또 베드로가 귀를 벤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데, 조토는 두 이야기를 한 장면에 담았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두 사건은 의미상 큰 차이가 있다. “예수에게 입을 맞추려는 유다의 행동은 오랜 준비 아래 나온 것인데 자살이라는 고통스러운 종말로 귀결된다. 반면 베드로의 행동은 즉흥적으로 분노와 흥분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예수가 다친 귀를 치유해주는 사랑의 기적이 뒤따른다. 선과 악으로 대조되는 두 이야기가 지닌 결말의 병치는 이 그림이 포함되어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전체 프레스코화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유다의 입맞춤’은 이탈리아 파두아에 위치한 스크로베니 예배당 남쪽 벽 중앙 하단에 그려진 예수의 수난을 그린 열두 장면 중 하나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모습은 예배당 안에서는 두 번 더 볼 수 있다. 바로 동쪽 제단 중간에 있는 ‘유다의 계약’과 서쪽 출입구 위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 중 지옥 부분에서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전체 구조 속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조토의 그림 속에 구현된 동시대인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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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정의

먼저 ‘유다의 계약’(위 그림). 대제사장들과 거래하는 유다의 뒤에 검은 악마가 그려져 있다. 조토의 시대에 악마는 여전히 인간의 외재적인 존재였다. 선(도덕, 정의)이 승리를 거두고, 악이 징벌을 받는 게 당연시되던 시대였던 것이다. 악마가 우리 밖에 있는 것은 사실 그나마 다행스럽다.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니까.

그러나 그 악마가 내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성격, 내 자아의 일부라면? 악마적인 면이 제어할 수 없는 큰 힘이 되어 자아를 지배한다면? 악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악의 숙주인 자신을 소멸시킬 수밖에 없다. 악의 소멸과 평온의 회복이라는 명징한 권선징악의 귀결, 행복하고도 고전적인 결말은 영원히 다다를 수 없게 된다. 18세기 말 등장한 고딕 소설들의 으스스한 결말들, 악의 숙주가 된 인간들의 무서운 자기 파멸들이 문화사에 줄이어 등장한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조토의 ‘유다의 입맞춤’에서 악은 승리하지 못한다. 횃불이 타오르고 창이 치솟는 폭력적이고 소란스러운 와중에 그림의 중앙에는 아주 고요하고도 심대한 정신적인 대결이 펼쳐진다. 유다는 예수에게 키스하려 했지만, 하지 못한다. 당시 스승에 대한 제자의 입맞춤은 가장 큰 공경, 가장 깊은 신뢰와 우호의 표현이었다. 유다가 입 맞추려는 순간 공경, 신뢰, 우호 같은 덕목의 행위는 가장 더러운 배신의 행위가 되고 만다. 그림을 압도하는 것은 유다가 입은 노란색이지만, 영혼의 대결에서는 예수가 압승을 거둔다. 예수의 머리에 둘러진 중세적인 후광보다 더 빛나는 것은 형형한 눈빛이다.

조토의 세상에서 도덕은 여전히 아름다움과 밀접하게 손잡고 있다. 이것은 멋진 일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다. 예수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이 빛나고, 날렵한 콧날과 단아한 이마 선은 아름답다.

반면 유다의 낮은 이마와 움푹 꺼진 콧날과 작은 눈은 추한 유대인을 대변한다. 유다의 행위만큼 유다의 외모는 추하게 묘사된 것이다. 사실 예수, 베드로, 유다 모두 유대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가 비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나가면서 거세진 유대인 혐오는 유다라는 인물에게만 유대인의 특성을 부여하는 기현상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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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4세기 조토의 시대는 성찰의 시대가 아닌 믿음의 시대였다. 믿음은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추와 악덕 더 나아가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악에 대한 선의 승리는 추에 대한 미의 승리로 대체됐다. 마치 예수로 대변되는 선의 승리의 합당함을 확증이라도 하듯이 ‘유다의 입맞춤’ 하단에는 일곱 가지 미덕 중에서 중심부를 차지하는, 가장 큰 크기의 ‘정의’의 알레고리화(위 그림)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도덕, 정의, 선, 아름다움이 승리하는 게 정의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수가 체포된 후에 유다는 다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은전 30냥을 돌려주고 자기의 죄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들은 차갑게 거절했고,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살한 유다는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떨어진다.

조토의 세상 ‘선 = 아름다움’

추한 유대인으로 그려진 유다

예수는 날렵하고 단아한 외모

중앙에 펼쳐진 정신적 대결은

형형한 눈빛, 아름다움의 승리

조토의 벽화가 그려진 예배당

부유한 상인 스크로베니가 기증

교회 미움받던 고리대금업자들

돈으로 사면받게 된 모습 반영

조토가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스크로베니는 지옥 반대편 위치

구원받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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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지옥과 얼음 지옥

스크로베니 예배당이 자리 잡은 곳은 피사에서 한시간 남짓한 파두아. 때는 1300년 무렵. 당시 세속적인 이유 혹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거듭되는 전쟁들, 창궐하는 전염병, 봉건적 통치자 세력의 불합리한 정책들로 고통을 받던 중세 말의 유럽인들은 구원을 찾아 교회로 몰려들었다. 지금은 정의 실현이 불가능하지만, 최후의 심판인 그날에는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중세 말 유럽의 여러 교회에 ‘최후의 심판’ 도상이 유행했던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한다.

교회에 와서 구원과 정의를 위한 기도를 드렸던 사람들 중에는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상업혁명으로 큰돈을 벌게 된 신흥 상인계층, 금융종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지막지한 고금리 이자로 돈을 벌었지만, 동시에 많은 돈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예수의 성전에서 쫓겨났다는 점 때문이었다. 1274년까지만 해도 고리대금업자는 교회에 무덤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재산가들이 늘어나자, 돈으로 쌓인 죄를 사면받게 되는 다양한 안전장치들이 등장했다. 기부와 후원제도, 그리고 천국에 이르는 자기 수양의 과정인 연옥의 고안이 그것이라고 중세연구가인 자크 르 고프는 지적한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상인계층과 고리대금업자들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경제와 사회가 자본주의로 향하도록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을 지은 엔리코 스크로베니도 그런 가문 출신 중의 한 명이었다. 조토는 스크로베니가 지은 예배당에서 1304년부터 2년 동안 40여 점의 프레스코화와 14점의 자유화를 그렸다. 예배당의 서쪽에 위치한 ‘최후의 심판’에서는 심판의 날 스크로베니 예배당을 기증하는 스크로베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토는 스크로베니를 예수의 오른쪽 지옥의 반대편에 그려 넣음으로써 그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조토와 동시대인이자 문학사상 “최고의 도덕주의자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단테(Alighieri Dante·1265~1321)의 생각은 달랐다. 1321년에 발표한 <신곡>에서 단테는 스크로베니가 일곱 번째 지옥의 불타는 모래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묘사했다.

지옥에 떨어진 유다의 모습에 대해서도 동시대의 두 거장이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최후의 심판의 날, 재림한 예수는 원죄를 저지른 아담도 구원하지만, 유다는 구원하지 않는다. 영원한 저주만이 그의 숙명이다.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에서 유다는 가장 깊은 아홉 번째 지옥에 유폐되어 있다. 단테는 이 아홉 번째 지옥에서도 가장 깊은 곳을 유다(Juda)의 이름을 따서 ‘유데카(Judecca)’라 명했다. 유데카는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을 배신한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단테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죄는 자신의 신념을 기만하는 것이다.

조토의 그림에서 지옥은 전통적인 ‘뜨겁게 불타는 지옥(Hell under Fire)’이다. 그러나 단테가 생각하는 배신의 지옥인 유데카는 모든 것이 얼어붙은 극강의 얼음 지옥이다. 이곳은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없는 소통부재의 공간으로 모든 것이 차갑게 얼어버린다. 자신의 말(신념)을 배신한 사람에게는 소통 자체가 무의미하니, 그럴듯한 상상이다. 단테의 문학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인간, 자의식을 가진 인간의 자기 배반의 문제를 거론한다는 점에서 조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성찰보다 믿음이 중요하던 시절의 정의는 지옥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었다. 세속화, 인간화를 위한 더 깊은 걸음은 뒤따르는 화가 마사초에 의해서 내딛게 된다.

▶필자 이진숙

경향신문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여행을 하며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에 큰 감명을 받아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미술사> <미술의 빅뱅> <위대한 미술책> 등 저서가 있다.


<이진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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