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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오철수칼럼]성장 정책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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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개혁 = 대기업 특혜' 라는

그릇된 인식 있는한 성과 어려워

원격의료·빅데이터 등 규제개혁

대통령이 직접 국회설득 나서야

기존산업 혁신방안도 고민 필요

서울경제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26년 영국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등장했다. 증기기관을 탑재한 28인승의 이 승용차는 런던 시내는 물론이고 인근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에 투입돼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자동차 보급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마차업자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마차업자들은 마차를 타는 귀족과 말이 놀란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동차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1865년 등장한 것이 이른바 ‘적기조례(Red Flag Acts)’다. 조례는 자동차 속도를 교외에서는 시속 6㎞, 시내에서는 3㎞로 제한했다. 자동차보다 60야드 앞에서 붉은 기나 랜턴을 들고 마차에 자동차의 접근을 예고하는 사람도 두도록 했다. 이런 조치가 과연 마차산업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됐을까. 사양산업인 마차를 보호하기는커녕 자동차라는 새로운 산업의 태동도 막아버렸다. 이 조례가 시행된 31년 동안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은 영국에서 독일·프랑스·미국 등으로 넘어가 버렸다.

153년 전의 일이지만 이는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는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약해지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하지만 신산업 창출은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첫 번째는 혁신성장을 하겠다면서 그물망 같은 규제를 풀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존 산업의 혁신에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규제 사례가 원격의료다. 의료 선진국을 자부하는 우리나라는 앞선 의료기술과 정보기술(IT) 인프라를 바탕으로 2000년대 초부터 원격의료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우려 했지만 정치권과 의료계의 반대에 부딪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원격진료를 허용하는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이 18대와 19대 국회에서 무산된 데 이어 20대 국회에서도 대형 병원을 배 불린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의가 올스톱됐다. 국내에서 원격의료가 지지부진한 사이 미국과 일본·유럽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관련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의료 서비스 시장에서 한국은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혁신성장이 더딘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는 지난해 9월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혁신성장 15대 주요 대책을 발표했지만 1년이 다 돼가도록 이렇다 할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나마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빅데이터 활용도를 높이는 구상은 정부 정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 정권에서 신산업 태동을 위해 추진해온 규제프리존법은 대기업에 특혜를 준다는 희한한 논리로 무산돼 버렸다. 정부는 뒤늦게 비슷한 내용의 규제샌드박스를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의료나 바이오 등이 빠지면서 대상이 제한적인데다 그나마도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혁신성장이 부진하자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책임지고 성과를 내라고 재촉하고 있지만 국회 입법이 걸려 있는 이런 문제는 부총리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회를 설득해야 한다.

여기에서 또 하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혁신성장이 신생 기업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부 정책은 중소·벤처기업 지원과 스타트업 창업에 머물러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기존 산업을 혁신하기 위한 정책은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대기업은 성장 파트너로 보기보다 개혁의 대상으로만 보고 온갖 압력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지배구조 개편, 정규직화 등 기업을 옥죄는 정책들만 난무하고 있다. 이러니 대기업들은 정부에 꼬투리 잡히지 않을 생각에만 급급할 뿐 혁신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진정 혁신성장에서 성과를 내려면 기업의 규모가 아니라 혁신성에 초점을 두고 지원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지금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기 위해 숨 가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조선 등 기존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성장산업 경쟁에서도 뒤처지면 우리는 영원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때 각종 규제는 놓아둔 채 말로만 혁신성장을 외치는 것은 신산업 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중소·벤처기업은 보호 대상이고 대기업은 개혁 대상이라고 보는 이분법적 사고도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리 혁신성장을 강조해봐야 성과를 내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미국 경제학자인 윌리엄 보멀 교수가 말한 혁신의 조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혁신을 하려면 기업들이 비즈니스하기 쉬워야 한다.” /cso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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