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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기고] 한국, 한반도 평화의 등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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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미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을 미루어 여러 논의가 오갔을 것으로 보이지만, 북·미 공동성명은 남북 판문점 선언과 비교할 때 매우 상징적이면서 간결했다. 짧은 결과문이 나온 것은 북한의 비핵화 살라미(단계화) 전술일 수도 있고, 트럼프가 과연 체제 보장을 실천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판단이 되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에 대해 본격적 논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 아무런 실익 없이 성명에 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미국이 이번에 북한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해 시간이 좀 더 필요했을 수도 있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바로 직전 캐나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1대6 '맞짱'을 뜬 트럼프가 아들뻘 김정은을 상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자신을 상당히 억제하는 트럼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혹 개인 이익 우선(Trump First)의 트럼프식 단계적·동시적 살라미 전술일 수 있다. 북한 효과를 여러 번, 점점 더 크게 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몇 단계로 나눠 대선까지 가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성과 논란이 있는 것과 달리 중국은 의심의 여지 없이 회담 결과를 만끽하고 있다. 김정은의 중국국제항공 전용기 이용에서 보듯 중국 패싱(소외) 논란을 일소했다. 중국은 무대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임을 확실히 알렸다. 김정은이 한 달에 두 번이나 방중한 것에서 보듯 앞으로도 언제든지 어디서든 만나는 특수관계임을 보여줬다. 성명은 중국이 그동안 얘기해왔던 쌍중단(雙暫停·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한미 군사훈련 동시 중단), 쌍궤병행(雙軌竝行·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 병행 추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편 중국의 본격적인 등장에도 불구하고 한중 양국 관계는 애매해 보인다. 지난 3월 말 양제츠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 중·북정상회담 결과 설명차 방한했을 때 우리 정부의 브리핑에서 중·북회담은 미세먼지 해소, 중국 단체관광 정상화, 전기차 배터리 보조금보다도 아래였다. 남·북·미 3자 종전선언 구상은 중국으로 하여금 한국이 중국을 배제하려 한다고 의심하게 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한국을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 한국과 소원하면 포스트 북·미회담 이후 상황이 중국에 결코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평화체제 논의 과정에서 주한미군, 사드 문제는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고, 결국 한국의 입장이 중요하다.

중국은 남·북·미 종전선언이 군사적 대치를 해소한다는 협의(俠義) 차원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대신 평화협정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우리로서는 중국이 평화협정에 늦게 참여할수록 좋지만 중국을 못 들어오게 할 수는 없다. 중국은 패싱 논란 때 판 밖에서도 여전히 판 안에 영향을 미쳤다.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김정은은 베이징에, 다롄에 다녀갔다. 못 들어오게 해도 중국이 마음먹으면 국면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불편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북·미회담 성명에 'CVID' 용어가 들어가지 않아 현재 논란이 있지만 우리 정부가 원했던 소기의 목적은 대부분 달성됐다. 북·미 간 직접 만남이 이뤄졌고 한반도 평화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대신 평화체제 과정에 한국의 중재자 역할이 축소될 수 있다. 한반도 상황이 나빠져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주변 환경이 개선되면서 오는 현상이다. 우리가 섭섭한 상황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럴 때일수록 어두운 밤을 밝히는 은은한 등대 역할을 해야 한다. 배가 충돌하거나 난파하지 않도록 길라잡이가 돼야 한다.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산책이 세계적으로 큰 감동을 주었듯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해 묵묵히 기꺼이 북한과 주변국들과 함께하는 동행자 역할의 역사적 소임을 다해야 한다.

[황재호 한국외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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