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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긴자서 술마실 돈으로 젊은 예술가 꿈에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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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서울 신사동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스사키 가쓰시게 대표, 하명구 작가, 정유진 대표(왼쪽부터)가 사진작가 김용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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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사이타마현 아사카시. 스사키 카츠시게 마루누마그룹 대표(67)는 한국 도예 작가 하명구(35) 작품 사진집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후 "자네의 꿈을 이루는데 뭘 도와줬으면 좋을까"라고 질문했다.

교토시립예술대학원을 졸업한 후 지인의 소개로 그를 찾은 하 작가는 "죽을 때까지 좋은 창작자, 진짜 프로로 살아가고 싶다. 그 꿈을 이룰 작업실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3개월 후 하 작가는 스사키 대표의 자택 인근에 위치한 예술가 레지던시 '마루누마 예술의 숲'의 첫 외국인 작가가 되어 5년째 머물고 있다. 이 레지던시는 6611㎡(2000평) 규모로 그를 비롯해 예술가 12명이 둥지를 틀고 있다. 스사키 대표는 1985년 이 곳을 설립해 작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작품 제작에 필요한 재료와 설비, 전시회와 비엔날레 참가비 뿐만 아니라 온천 여행도 보내준다. 소속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는 컬렉터이기도 하다. 그가 지난 7일부터 27일까지 대전시 구암동 지소 갤러리에서 열리는 하 작가의 국내 첫 개인전 '해학 속에 숨겨진 메세지'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최근 서울 신사동에서 만난 스사키 대표는 이번 전시 작품에 대해 "기대 이상"이라고 추켜세웠다. 이어 "5년 전 하 작가를 처음 봤을 때 작품 안에서 뭔가 보였다. 어린데도 깊이가 느껴졌다. 그의 꿈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와 동행한 하 작가는 "작업실 근처에 사시는 대표님과 자주 밥을 먹고 작품을 의논한다. 아버지나 친구처럼 대해주시면서도 작품을 평가할 때는 냉혹한 컬렉터가 된다"고 말했다.

하 작가는 전설이나 신화 등 구전문학 속 요괴를 통해 요즘 세태를 풍자하는 도자기 작품을 주로 제작하고 있다. 나쁜 정치인만 잡아먹는 요괴 등 해학적인 생김새 속에 날카로운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해에는 스사키 대표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아사카시 공식 마스코트인 민들레 요정 '포포탄'도 제작했다. 일본 정부가 외국인에게 공공미술을 맡기는 것은 이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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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속 요괴를 통해 현실을 비판한 하명구 작가의 도예 작품.


스사키 대표는 도예에 대한 애정이 깊다. 66만㎡(20만평) 규모 마루누마 창고, 유리 공장·인력파견·부동산 관리업체인 마루누마 상사를 경영하면서 연간 매출 200억원을 올리던 그는 1984년 도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취미를 가지라는 조부의 권유로 도예를 시작했다. 인생을 살아보니 취미가 없는 인생은 고독하고 불행하다"고 말했다. 작업실을 만들고 도쿄예술대학교 출신 작가에게 도예를 배우던 중에 젊은 작가들이 작업 공간 때문에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 이듬해 레지던시를 설립했다. 지원 작가를 선정할 때 인간성과 작품성, 꿈을 본다.

20여년 전에는 '아시아의 앤디 워홀'로 불리는 세계적인 팝 아트 작가 무라카미 타카시(56)의 꿈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대 후반 도쿄예술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무라카미는 스사키 대표에게 "내 작품들을 모두 구입해주면 두 가지를 약속하겠다. 첫째는 일본화 전공 박사 1호가 되겠다, 둘째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작가 되겠다"고 제안했다.

스사키 대표는 "처음에는 미친 놈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진지하게 꿈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다. 무라카미가 꿈을 이룰 지 안 이룰 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꿈을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다. 도쿄 긴자의 비싼 술집에서 여자들과 놀면서 수천만원 쓰는 것보다는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투자하는게 더 즐거워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33년간 레지던시를 운영하면서 내가 작가들을 키워준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 성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무라카미는 1990년대 초반부터 20년간 '마루누마 예술의 숲'에서 작업했다. 스사키 대표는 그의 초기작인 '칼라즈' 시리즈를 구입해 작가로서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작품을 구입하다보니 3000여점을 소장하게 됐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히로시 스키모토 데뷔작 '극장' 시리즈 48점 뿐만 아니라 러시아 출신 화가 샤갈, 프랑스 조각가 로댕과 그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 미국 사실주의 화가 앤드루 와이에스 등의 주요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스사키 대표는 "레지던시 작가들의 연구에 필요한 작품을 주로 구입했다. 투자 목적보다는 교육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림을 먼저 만난게 아니라 예술가를 사귀게 되면서 작품을 사게 됐다. 내가 잠깐 미술품을 빌리는 것일 뿐,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작가 지원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미술 교류의 다리 역할을 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주일 한국대사관과 한국문화원에서 하 작가를 비롯해 '마루누마 예술의 숲' 작가들의 전시를 열었다. 하 작가의 국내 전속 화랑인 유진갤러리 정유진 대표와 손잡고 내년에 서울 전시도 추진하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 동행한 정 대표는 "4년째 도쿄아트페어에 참가하면서 한국과 일본 작가들의 교류에 주력하고 있다. 스사키 대표를 롤모델 삼아 양국 작가들을 지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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