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첫 책 ‘건축과 풍화’ 펴낸 건축가 조성룡 “이젠 우리도 도시에서 어떻게 주고받으며 살지 고민해야 할 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파트는 도시 속 ‘섬’이 아니라 열려 있고 함께하는 공공 건축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구조물은 설계부터 ‘품위’ 지킬 노력해야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선유도공원(2002), 어린이대공원 꿈마루(2011), 이응노의 집-생가 기념관(2011). 건축가 조성룡(74)의 주요 작업으로 거론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건축 인생 40여년 만에 처음 펴낸 책 <건축과 풍화>(수류산방)는 아파트 이야기로 시작한다. 건축계 ‘등단작’이자 33년째 사는 삶의 터전, 잠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다.

아파트는 조성룡에게 단순한 주거공간의 의미를 넘어선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만난 그는 “땅이 모자라서 고층으로 밀도를 높여서 지을 수밖에 없다고는 해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며 “아파트도 남들과 조금씩 다르게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성룡은 1983년 한국 최초의 아파트 국제설계공모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및 기념 공원’에 당선되며 이름을 알렸다. 35년이 흐른 지난 5월, 서울시가 주최한 재건축 사상 첫 국제현상설계 ‘잠실 5단지 주거복합시설’에서 1위로 뽑혔다. 우연이라기에는 묘한, 역사의 ‘수미상관’이 연상된다.

노건축가도 두 개의 작업 사이에 놓인 역사성을 의식하는 듯했다. 그가 잠실 5단지 재건축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에 뛰어든 데는 설계사무소 ‘조성룡 도시건축’ 대표로서의 책무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보다는 오랜 ‘공동주택’에 대한 관심에 더해, 재건축의 ‘공공성’ 개념을 바로 세우겠다는 포부가 더 작용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재건축사업이 사익 추구만 난무하는 장이 되다 보니 서울시가 설계안 국제공모를 했거든요.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재건축이 많이 이뤄질 텐데, 근본적으로 도시에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조성룡의 설계안은 잠실 5단지가 접한 송파대로와 올림픽로의 ‘공공성’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롯데월드타워 등 상업시설이 밀집한 도시 중심가에서 단지가 ‘섬’처럼 따로 존재하지 않고, 도시와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평소 철학도 담았다. 일부 주민들이 설계 외형이나 단지 내 도로, 공용 광장, 50층 주거시설 위치에 반대하고 있다. 최근 조합 총회에서 74% 이상 찬성으로 설계안이 통과됐지만, 갈등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서울시가 지방선거 때문에 일체의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며 “시와 주민들 사이에 끼여 지금 사면초가 상태”라고 말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서울역 고가 활용 프로젝트 등 공공 주도 국제현상설계는 추진 과정에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조성룡은 “(공모전은) 새로운 사회 변화에 맞춰서 새로운 생각을 펼쳐나가기 위해서 여는 것”이라며 “정부가 너무 트렌드나 스펙터클을 원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나치게 ‘스펙터클’하고 ‘미래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기존 서울역 고가 구조물을 유지하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여러 층위의 길을 구상했던 조성룡의 설계안은 네덜란드 MVRDV의 ‘공중 식물원’에 밀려 2위로 낙선했다.

공공건축, 공간과 사람의 역동적 관계 맺음, 경관·지형·역사와의 상호작용. 조성룡이 평생 붙들어 온 몇 개의 화두다. 그가 보는 ‘공공(公共)’은 ‘열려 있다’와 ‘함께’의 집합체다. “공공건축은 공공 주체가 만든 것이나 공공으로 쓰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집도 지어지는 순간부터 공공의 성격을 띠게 되지요. 공공을 개인 재산을 빼앗아가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이제 도시에서 서로 어떻게 주고받으며 살 것인지를 생각할 때입니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초기작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는 이런 조성룡 건축 철학의 ‘원형’을 보여준다. 단지 내에 여러 갈래의 길을 내고, 1층을 띄운 ‘필로티’를 통해 찻길을 거치지 않고도 각 동을 지나다니도록 한 것 모두 ‘마을’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다. “사람과 나무는 같이 자라며 삶을 공유한다”는 생각에서 많은 나무들을 심었고, 지금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책 제목인 ‘풍화(weathering)’는 조성룡이 지난 세월 아파트를 비롯해 수많은 건축물을 세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체득한 개념이다. 그는 시간의 작용에 따라 바래지고 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구조물의 숙명이라면, 설계 단계에서부터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책은 소마미술관, 꿈마루, 이화마을 등 그가 설계한 작업들과 건축관을 들려준다.

성균관대 성균건축도시설계원 초빙교수로 ‘현대주거’ 등을 강의하는 조성룡이 학생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이 하나 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설계의 키(key)”라는 것이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튿날 구조작업에 도움이 될까 하여 배 모형을 만든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이런 것도 바로 생각이 나지 않고 하루가 지나서야 떠올랐다”고 말했다.

조성룡의 작업실은 책을 펴낸 출판사 수류산방과 같은 건물의 2층에 있다. 데님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가파른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내렸다. 한국 현대건축사에 족적을 남긴 ‘4·3그룹’과 서울건축학교(SA)를 언급하자 그는 “여럿이 함께한 일이고, 그것들이 쌓여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따로 기념할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건축과 풍화> 역시 출판사와의 ‘공동작업’임을 거듭 강조했다. 심세중 편집장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엮은 이 책은 앞으로 출간될 <건축의 소멸> <건축과 풍류>와 함께 ‘조성룡 3부작’을 구성할 예정이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