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처음부터 끝까지 ‘홍대 몰카범 수사’는 달랐다

댓글 3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21] 여성 피해사건 수사 과정과 확연한 차이…

플랫폼·운영진 수사 등 피해자들이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것’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네!”

지난 5월19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2번 출구 앞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나온 여성 참가자가 손에 든 붉은 손팻말에 쓰인 문구는 수사기관을 향해 조롱하듯 따져묻고 있었다. 남성이 피해자인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불법촬영) 사건’ 수사에선 사건 발생 12일 만에 범인을 검거할 정도로 유능한 경찰이, 그동안 여성 피해자 사건 수사에선 왜 그토록 무능했느냐고. 여성이라는 단일 주제로 역대 최대 규모 집회를 이끌어낸 참가자 1만2천여 명도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동일범죄 동일수사 동일인권”을 촉구하며 “남피해자 쾌속수사 여피해자 수사거부” “편파수사 부당하다 남자들도 처벌하라”는 규탄 구호를 목이 찢어지도록, 절규처럼 쏟아냈다. 닷새 전인 5월14일 이주민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성별에 따라 (수사) 속도를 늦추거나 빨리하거나 공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분노한 여성들에겐 해명이 되지 않았던 셈이다.

사이버 성폭력 피해 여성의 신고 접수와 피해 영상 삭제 등을 돕는 인권단체인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는 지난해 5월부터 현재까지 300여 건의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했다. 지난해 5~12월 상담한 206건을 집계해보니, 여성 피해자(여성 93.7%, 남녀 공동 3%, 남성 3.3%)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5월23일 <한겨레21>을 만난 한서성 서랑 대표와 효린 상담팀장은 홍대 사건에서 경찰이 보여준 적극적인 수사 태도는 전례에 비춰볼 때 이례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서성은 “홍대 사건 수사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이번 수사에서 한 조처는 그동안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들이 간절히 원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던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분노했다”며 홍대 수사와 기존 여성 피해자 사례를 비교해 설명했다. ‘피해자 특정’을 경계하는 한사성 방침에 따라 사건과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사건을 재구성했다.


한겨레21

지난 5월19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2번 출구 근처에서 1만2천여 명의 여성이 모인 가운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열렸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이버 성폭력 수사도 ‘복불복’이다. 의지와 능력이 있는 수사팀을 만나 운 좋게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다만 더 많은 여성 피해자들이 사건 접수 때부터 사실상 ‘수사 거부’로 오해할 만한 경험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홍대 사건, 수사 시작부터 달랐다.

사이버공간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은 사건의 특성상 ‘관할 지역’이 따로 없다. 피해자가 경찰서에 신고하러 가면 관할을 핑계로 사건 접수를 떠넘기는 일이 벌어진다. “가해자 주거지 경찰서로 가라”거나 “몰카가 찍힌 모텔 관할 경찰서로 가라”는 식이다. “증거물이 흑백이면 안 되니 컬러로 뽑아오라”거나 “양면은 안 되니 단면으로 다시 출력해 오라”고 돌려보내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도 벌어진다. 대부분 피해자는 학교에서 형사소송법을 배운 적도, 비슷한 사건을 경험한 적도 없다. 주눅 든 상태에서 경찰이 “가라”면 가고, 그렇게 ‘뺑뺑이’를 돌다가 신고 의지마저 꺾인다.

다른 경찰서로 사건을 미루는 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아예 “신고해봐야 범인을 못 잡는다”거나 “무고로 고소당할 수 있다”며 신고를 말리기도 한다. “영상 속 여성 다리에는 점이 안 보이는데 당신 다리에는 점이 많지 않느냐,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해자가 당신을 역고소할 수 있다”고 신고를 반려한 적도 있다.

피해자들이 사건 접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최악의 경험은 ‘순결한 피해자 프레임’과 ‘책임 전가’다. 채팅을 하면서 찍힌 촬영물로 피해를 본 여학생은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다가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혼이 났다. 용기를 내 야간자율학습까지 빠지고 갔다가 되레 경찰한테 2차 피해를 당한 셈이다. 외도 과정에서 영상이 찍힌 여성은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며 훈계를 듣기도 했다. 이런 일을 겪은 피해자들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 대신 ‘내가 왜 그런 사람(가해자)을 만났을까’ ‘내가 바보’라는 자기환멸과 죄책감을 갖게 된다. 신고할 생각이 사라지고, ‘영상이라도 삭제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사성을 찾는다. 수사 담당자가 보여준 귀찮아하는 태도와 눈빛과 말투, 그 모든 것이 피해자에게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 수련회 ‘몰카범’은 왜 잡지 못했을까

한겨레21

지난 5월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와 김포여성상담센터가 ‘성폭력처벌법 제14조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질의응답하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홍대 사건 수사에서 경찰은 누드 크로키 수업에 참가했던 학생과 모델 등 20여 명을 참고인 조사한 끝에 가해자를 특정했다. 지난해 여름, 한 학교에서 유사한 불법촬영 피해가 있었을 때도 그렇게 수사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분명히 이 학교 교실과 교내 수련회에서 찍힌 영상이었다. 누가 봐도 가해자는 그 교실, 그 수련회에 함께 있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끝내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요즘도 포르노 사이트에는 해당 피해 영상이 떠돌아다닌다.

용의자가 완벽히 특정되는 상황에서 경찰이 검거에 실패하기도 한다. 연애 당시 합의 아래 남자친구의 휴대전화로 찍은 영상이 동의 없이 유포됐다. 게시글엔 오직 ‘그 사람만’ 알 수 있는 피해자 정보가 포함돼 있었다. 피해자가 이를 경찰에 알렸으나, 경찰은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별다른 검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용의자가 가해 사실을 부인하고, 피해 영상이 유출된 사이트의 서버가 외국에 있어 게시물을 올린 사람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가해자가 순순히 범행 사실을 인정하는 사건이 몇이나 된다고…’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절망하는 이유다.

경찰은 홍대 수사에서 피의자를 구속하고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다. 대부분 사이버 성폭력 피해 여성이 강력하게 요구하는 조처다. 가해자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다. 불법 영상 유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홍대 사건뿐만 아니라, 대다수 불법 영상 유포 사건에서는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 그러나 한사성이 상담한 300여 건 중 구속 수사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없다. 압수수색을 하더라도 영상이 촬영된 휴대전화 정도였다. 홍대 수사에서처럼 피의자 주거지를 압수수색하는 건 사이버 성폭력 상담 전문가들에게도 낯선 풍경이다.

동의 없이 찍은 영상물이 피해자의 이름·학교·신분증·연락처를 포함한 신상정보와 함께 포르노 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유출된 적이 있었다. 용의자는 전 남자친구 한 명으로 특정됐다. 피해 증거도 수집됐다. 피해자는 경찰에 전 남자친구를 고소하면서, 추가 유포나 증거인멸 가능성을 막아달라며 구속 수사를 요청했다. 원본 영상을 찾아내 삭제할 수 있도록 주거지 압수수색도 요구했으나, 경찰은 이를 묵살했다. 피해자의 신고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가해자는 앙심을 품었다. 또다시 원본 영상을 유포했고 피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고소와 삭제 등 피해 회복 과정이 그대로 되풀이됐다. ‘첫 번째 고소 때 구속과 압수수색만 이뤄졌어도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피해자는 경찰이 원망스럽다.

홍대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가해자 검거에 그치지 않았다. 피해 모델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댓글을 단 여성 인터넷 커뮤니티 ‘워마드’ 회원 2명을 추적했다. 미국 구글 본사에 워마드 관리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전자우편 정보 확인도 요청했다. 워마드 관리자가 범죄 사실을 알고도 가해자의 활동 기록을 삭제해줬다면, 증거인멸 공범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압수수색·구속 수사 그토록 원했건만

한사성은 “피해자의 신고로 경찰이 가해자뿐만 아니라 불법 영상이 유포된 플랫폼의 범죄 행각까지 인지한 경우, 플랫폼의 범죄 또한 수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드디어’ 확인받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며 이번 홍대 사건 수사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그동안) 경찰의 문제 해결 능력을 과소평가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자성 속엔 ‘뼈’가 있다. 여성이 피해자인 다른 불법 영상 유출 사건 가해자들도 수사가 시작되면 으레 증거를 없애려 포르노 사이트에 게시물 삭제를 요청한다. 그렇다고 경찰이 증거인멸 공범으로 포르노 사이트나 그 관리자를 수사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불법 촬영 영상 피해 여성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홍대 피해 영상이 유포된 워마드가 수사를 받게 됐다는 소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찰은 불법 영상·성매매·성폭행·아동포르노 등 온갖 불법의 온상지인 수많은 포르노 사이트를 통상 “서버가 해외에 있어서” 수사가 어렵다는 말을 기계처럼 반복해왔다. 심지어 홍대 사건으로 편파수사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5월23일 오전, 효린 팀장은 한 피해 여성의 전화를 받고 맥이 탁 풀렸다. “가해자가 혐의를 부인하고 영상이 외국에 서버를 둔 사이트에 유출돼 수사가 어렵다며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겠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사이버 성폭력엔 국경이 없다. 한사성이 파악한 상당수 국내 포르노 사이트 서버는 외국에 있다. 그 가운데 90% 정도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수사기관 간담회나 국회 토론회가 있을 때마다 국외 서버 수사를 요청하지만 진척이 없다. 미 연방법에서 ‘리벤지 포르노’(헤어진 연인에게 보복하기 위한 성적 사진·영상) 유포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아 수사 협조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식이다.

경찰이 움직이지 않으니 피해자가 직접 ‘함정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한 피해 여성은 외국에 서버를 둔 사이트에서 불법 영상을 구하는 척 가해자들에게 쪽지와 전자우편을 보내거나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를 통해 국내에 서버를 둔 전자우편 주소나 휴대전화 번호, 은행 계좌번호를 얻어낸 뒤 가해자를 특정해 고소하는 방식으로 실제 처벌을 이끌어냈다.

국외 서버 수사가 그리 쉬웠다니…

한사성도 더 이상 경찰의 국외 서버 수사만 쳐다보지 않겠다는 계획이다. 국제 비정부기구(NGO) 차원에서 ‘해외 서버’ 문제를 돌파해볼 작정이다. 한사성은 미국 시민단체 ‘사이버 시민 권리 구상’(CCRI)을 비롯해 대만·일본·영국·독일 등 성폭력 피해자 지원 단체들과 국제 연대체를 꾸리려 한다. 각 나라 시민단체들이 연대해 ‘국경 없는’ 사이버 성폭력 문제에 대응하고, 각국 수사기관의 국제 공조도 압박한다는 포부다.

글·사진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공식 SNS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