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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부관참시? 이장?…백제인들은 왜 귀족무덤을 되파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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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충남 부여 능안골 고분군 정밀발굴 결과

파묘·이장 흔적 있는 굴식돌방무덤 발견

파묘한 배경은 풀어야 할 미스터리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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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안골 고분군 1호 무덤의 석실 내부 전경. 바닥과 벽면에 원래 무덤방에 쓰인 석재를 훑어서 모두 빼간 이장의 자취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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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전 백제인들이 길지를 찾아 묏자리를 옮긴 걸까. 대죄를 저지른 후손들 탓에 선조들 묘를 파헤친 ‘부관참시’일까.

백제시대 귀족무덤을 되파서 허물고 주검을 옮긴 이장 흔적이 최근 백제 고도인 충남 부여(사비)의 옛 무덤떼에서 발견됐다.

문화재청과 부여군은 부여읍 능안골 고분군(국가사적)의 북서쪽 구역을 최근 정밀발굴한 결과 파묘(破墓), 이장 흔적이 보이는 7세기께 백제 귀족층 무덤을 찾아냈다고 28일 발표했다.

백제고도문화재단에 의뢰해 벌인 조사 내용을 보면, 모두 4기의 백제 사비도읍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 드러났다. 우선 눈길을 끄는게 1호 무덤이다. 땅을 판 자리인 전체 묘광 길이가 270cm, 최대 깊이는 420cm, 바깥에서 돌방으로 통하는 묘도의 길이만 9m에 달하는 큰 무덤으로, 백제 상층 귀족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건 주검을 묻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방의 돌부재를 모두 빼간 흔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무덤방 입구까지 반출로를 뚫어놓고 석재들을 훑어 빼낸 뒤 무덤 판 구덩이를 한번에 다시 메운 흔적이 석실 벽면과 토층에서 확인됐기 때문이다. 조사단 쪽은 “이런 양상으로 보면, 백제인들이 무덤을 되파서 허물고 주검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파묘와 이장 행위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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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안골 고분군 북서쪽 구역의 발굴현장 전경. 모두 4기의 백제 무덤이 발견됐는데, 1호 무덤에서 파묘와 이장의 흔적이 드러나 눈길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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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996년 벌인 능안골 발굴조사 때도 여러 백제무덤 등에서 파묘로 추정할만한 일부 자취를 찾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처럼 무덤 속 석재를 바닥면까지 모두 파내간 파묘의 확실한 흔적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철저하게 무덤을 허물려 했을까. 백제왕도핵심유적보존·관리사업추진단의 정수옥 연구사는 두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묏자리를 바꿔 주검을 다른 데로 모시기 위한 이장 용도이거나, 후손들이 반역 등의 중죄를 저질러 선조들의 묘를 파헤쳐 없앤 흔적으로 볼 수밖엔 없지요.”

백제 역사고고학계에 새롭게 풀어야할 수수께끼 하나가 던져진 셈이다. 다른 출토품으로는 3호 무덤에서 관을 고정시키는 작은 못인 관정과 꽃모양 장식이 붙은 관고리 1점이, 4호 무덤에서는 뚜껑돌 등이 나왔다. 조사단은 앞으로도 1호 무덤을 중심으로 추가 조사를 당분간 벌일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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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백제 무덤 안에서 나온 관고리와 작은 관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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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고리와 관못이 나온 3호 무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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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귀족들의 집단묘지로 추정되는 능안골 무덤떼는 6세기 중후반부터 7세기초까지 조성된 사비도읍기의 중심 고분군 가운데 하나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995, 96년 발굴조사할 당시 은제관모장식과 금동제귀고리 따위의 여러 고급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백제고도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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