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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권복규의 의료와 세상] 옛사람들의 낙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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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권복규 이화여대 의대 교수


청나라 유학자 기윤(紀?, 1724~1805)의 『열미초당필기』에는 불륜으로 임신한 어떤 과부에게 낙태약 주기를 거절했다가 저승에 끌려간 어떤 의사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성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녀 역시 강요에 의해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의사는 두 명을 살인한 죄로 명부(冥府)에 기소됐다. 의사는 “의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 어찌 죽여 이익을 취하겠소”라고 항변했고, 여성은 “지각없는 한 점 핏덩어리(一無知血塊)”를 없애주었다면 두 목숨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의사를 탓한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염라대왕은 “시세(時勢)를 따르고, 원칙만 고집하다 사안의 이해를 살피지 못한 자가 저 의사 하나뿐이랴”며 탄식한다.

중앙일보

의료와 세상 5/28


사실 이 이야기는 원칙만을 고집하다가 세상의 많은 일을 그르친 융통성 없는 성리학자들을 풍자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성리학자들이라면 우리 역사를 통해 그 수가 적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든 낙태를 절대 반대하는, 특정 원칙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장 의사는 낙태와 관련하여 특정 원칙만을 고수할 수 없기에 윤리적 갈등을 빚는다. 뱃속의 태아를 ‘지각없는 한 점 핏덩어리’ 또는 ‘사람의 목숨’으로 보는 각각의 시각에는 나름의 일리가 있다. 사안에 따라 원칙과 시세를 따르고 이득과 해악을 따지는 것은 필요하다. 이는 의료윤리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형법상 낙태죄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다.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율권’이 충돌한다는 관점은 매우 서구적인 생각이다. 우리 전통문화는 태아의 생명도 결코 가볍게 보지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예컨대 『동의보감』에는 산모의 몸이 약해 임신을 더는 유지할 수 없는 경우 안전하게 낙태하는 처방이 들어 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후손을 중시하고, 태교라는 이름으로 태아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던 조상들도 부득이한 경우 낙태를 금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지혜가 아닐까. 낙태를 모자보건법상의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처벌 대상으로 정한 현행 낙태죄를 폐지하고, 그 바탕 위에 낙태 문제를 정치하게 다룰 수 있는 제도와 절차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권복규 이화여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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