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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단독] “뭐가 예술사진이에요. 그건 강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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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4년차 모델 김보라씨는 지난 3월 자신의 SNS에 한 유명 포토그래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ㄱ포토그래퍼가 2015년 말 개인작업을 명목으로 김씨에게 접근했으며 작업 중 성폭행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미투를 꽃뱀몰이 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며 2년이 지난 후 사건을 공개하는 이유를 밝혔다. 김씨는 글에서 ㄱ포토그래퍼의 영문 이니셜 첫 글자를 공개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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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미투’는 최근 문제가 된 이른바 ‘비공개 촬영회’ 성폭력과 유사한 경우다. 유튜버 양예원씨와 배우 지망생 이소윤씨는 비공개 촬영회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밝혔다. 김씨에 따르면 이런 촬영회뿐만 아니라 포토그래퍼와 전문 모델들 간의 화보 촬영과 개인작업에서도 성폭력이 잦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건을 공론화하면 일을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모델들이 많다”고 말했다.

ㄱ포토그래퍼는 4월 김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ㄱ포토그래퍼 측은 “서로 합의 하에 한 관계였다”고 말했다. 글을 쓸 때만 해도 김씨는 ㄱ포토그래퍼에 대한 법적 대응 등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로부터 고소를 당한 이후, 적극적인 대응도 염두에 두고 있다. 김씨가 올린 글은 삭제되지 않았다. 그는 “사실이기 때문에 지울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5월 21일 서울 중구 정동 인근 카페에서 김씨를 만났다.

-피팅모델 사건이 이슈다. 모델업계는 어떤가?

“(성폭력) 안 겪어본 사람 없을 거다. 여자 모델들 사이에서 이미 소문이 난 포토그래퍼들이 있다. 가령 ‘누구는 만지면서 찍는다’ ‘누구랑은 사진 찍지 마라’ 이런 식이다. 제가 SNS에 글을 올린 이후에 다른 모델들로부터 연락을 많이 받았다. 비슷한 일을 당했는데 어디에 어떻게 도움을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공론화된 사건은 없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공론화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제 사건의 경우 상대 포토그래퍼는 유명 모델들이랑만 작업하고 사진도 잘 찍는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저는 아무 것도 없는 초년생 모델인데 누가 내 말을 들어줄까. 그 사건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나는 다시는 이 일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못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되니까.”

-성폭력은 주로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나.

“촬영에 스태프가 많으면 직접적인 터치를 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심각한 성폭력은 개인작업에서 발생한다. 개인작업이라는 걸 빌미로 ‘예술사진을 찍어보자’고 하는 포토그래퍼들이 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야 촬영이 매끄럽게 진행되니까 모델은 포토그래퍼가 원하는 방향으로 포즈나 표정을 지어야 한다.”

-본인 사건도 개인작업에서 발생한 건가.

“2015년 말에 ㄱ포토그래퍼와 화보 촬영을 했다. 화보 촬영이 끝나고 나중에 개인작업을 한 번 하자고 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내게 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좋았다. 이후 연락이 왔는데 강남구에 위치한 모텔로 오라고 했다. 스튜디오가 없는 포토그래퍼들은 모텔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그 사람은 돈도 많고 유명한데 왜 모텔로 오라고 할까? 좀 이상했다. 하지만 당시 제 남자친구와도 아는 사이였고 ‘저렇게 유명한 사람이 설마 이상한 짓을 하겠어’라는 마음에 그 장소로 갔다. 촬영을 하다가 상의를 탈의하는 게 더 예쁠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을 위해서라고 했기 때문에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점점 수위가 올라갔다. 미국의 한 유명 포토그래퍼가 있다. 섹슈얼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그 사람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런 느낌으로 찍고 싶다고 했다. 성관계 사진이었다. 불편하다고 말했지만 계속 ‘잠깐만 해보자’고 강요했다. 거부를 해도 계속 강요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 사진을 위해서라고 했으니까. 어떤 어떤 표정을 지어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건 사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후 어떤 조치를 취했나?

“사진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다 집어치우고 거기를 뛰쳐나갈 만한 판단도 들지 않았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업계가 원래 이런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일을 막 시작한 모델이었고 상대는 유명한 포토그래퍼였으니까. 너무 무서워서 집에 가서 울었다. 사진이 어디 유포될까봐 겁났고 소문 나면 모델 일을 하지 못하게 될까봐 신고도 못했다.”

-현재 상황은 어떤가.

“SNS에 글을 올린 이후, ㄱ포토그래퍼가 속한 에이전시가 ㄱ포토그래퍼와 계약을 해지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4월 말 검찰에서 피의사건 처분 결과 통지서를 받았다. 제가 명예훼손으로 피소됐다는 내용이다. 상대 변호사로부터 합의할 생각이 있냐는 연락도 받았다. 제가 겁을 먹고 합의를 한다면 합의했다는 걸로 꼬투리를 잡힐 것 같았다. 몇 명에게 고소를 당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저를 고소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올해 3월 SNS에 해당 사건에 대해 쓴 이유는 뭔가.

“그런 사람이 더 유명해지고 잘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다른 모델들에게도 저한테 한 것과 같은 짓을 할 수도 있으니까. 아예 비공개로 가해자를 지목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것도 아니다. 저는 가해자가 그 글을 보고 스스로 찔려서라도 앞으로 그런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공개 촬영회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포토그래퍼들이 제발 사진작업을 빌미로 모델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포토그래퍼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모델들에게 자신이 뭔가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절박한 모델들을 이용하는 거다. 얼굴 알려지고 유명한 모델들에게는 그렇게 안 한다. 그것도 예술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게 뭐가 예술이냐. 그건 예술이 아니다. 강간이다.”

SNS에 글을 올린 이후, 김씨는 ㄴ모델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ㄴ씨는 ㄱ포토그래퍼 실명을 거론하며 같은 사람인지를 물었다. ㄴ씨 역시 ㄱ포토그래퍼로부터 똑같은 방식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주간경향>은 ㄴ씨에게 접촉을 시도했지만 ㄴ씨는 “업계에 소문이 나는 게 무섭고 남자친구가 알게 될까봐 두렵다”고 전해왔다. 대신 ㄴ씨는 김씨 사건은 도울 수 있는 대로 돕겠다는 입장이다. 피해자가 여러 명이거나 가해자가 상습범일 경우 유죄 입증에 유리하다.

김씨는 일련의 상황을 두고 포토그래퍼들뿐 아니라 사진을 평가하는 잣대도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포토그래퍼는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사진만 잘 찍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진을 예쁘고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기에 좋으면 어떤 방식을 통해 나왔는지는 상관없다는 것”이라며 “그 사진이 사실은 성 착취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SNS 글과 관련해 김씨를 대리하고 있는 한승일 변호사는 “글에서 가해 지목자가 특정되기 쉽지 않고 설사 특정된다 해도 글의 목적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ㄱ포토그래퍼를 변호하고 있는 임재빈 변호사는 “서로 합의하에 한 관계였고 작업이었다”면서 “ㄱ포토그래퍼는 김씨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몰랐다. 당시 작업 사진을 증거로 제출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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