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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이슈 난민과 국제사회

[취재파일] 시리아 난민 캠프에서 태권도복이 인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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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끔한 태권도복 차림에 히잡을 두른 두 소녀가 도장 한가운데로 나옵니다. 서로 고개를 숙여 묵례를 나누자마자 겨루기 준비 자세를 취합니다. 두 소녀가 스텝을 밟기 시작하더니 한국인 심사관이 "시작"이라고 외치기 무섭게 옆차기, 돌려 차기 등 발기술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치열했던 겨루기도 잠시 한 소녀가 얼굴에 상대의 발차기에 맞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립니다. 사범님들과 많은 또래들이 다 같이 지켜보는 자리여서 무척 긴장했고, 또 크게 놀랐던 것 같습니다. 이때 우는 소녀를 지켜보던 심사관이 단박에 불호령을 내립니다.

"울지 마!"

소녀는 깜짝 놀라며 얼떨결에 울음을 그칩니다. 그리고는 자리로 들어와 마음을 진정시키며 도복 소매로 볼가에 남아 있던 눈물을 닦아냅니다. 곧이어 차례가 온 송판 격파에서 그녀는 단단한 기합과 함께 작은 주먹을 내뻗으며 송판을 둘로 쪼갭니다.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하고 굳어 있던 심사관의 표정에 미소가 스쳐 지나갑니다. 이는 지난 19일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에서 열렸던 띠 승급식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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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는 요르단의 자타리 지역에 자리한 시리아 난민 캠프 안에 있습니다. 참고로 이 캠프는 시리아 국경에서 불과 15㎞ 떨어져 있을 정도로 시리아와 매우 가깝습니다. 2011년 발생한 시리아 내전을 피해 온 난민들이 이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14만 명까지 살았으나, 지금은 많이 빠져나가 8만 명 선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도 규모로 따지면 여전히 세계 최대 시리아 난민 캠프로 불립니다.

이곳 난민들은 대부분 시리아 반군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왔습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온 이들이 많지만, 현 시리아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도 상당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캠프 내 임시 거주 공간에 시리아 자국기를 걸지 않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난민들은 요르단 수도나 다른 도시에서 거처를 구해 살고 있습니다. 난민 캠프에 머무르는 이들은 사실 빈곤층입니다. 문제는 캠프에 살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부모들조차 먹고살기 힘드니 그 아이들은 오죽할까요? 캠프 내에 학교를 비롯해 아이들을 위한 시설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들은 사실상 허허벌판에 '내버려 져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방치돼있는 게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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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계 각국 정부와 민간 구호 단체가 교육 시설을 짓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두 학교의 아이들 규모가 제일 크고, 이곳 부모들이 선호한다고 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건립한 학교랑 한국인이 세운 학교인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입니다. 이중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는 난민 캠프가 설립된 지 1년 뒤인 2013년에 개교했습니다. 난민 아동에게 태권도 말고도 음악, 미술 등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3백여 명이 다니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학교는 오일머니의 재력을 바탕으로 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그에 비해 민간단체의 돈으로 운영되는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는 시설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곳은 시리아 학부모와 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학교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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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신체 활동이 한창 왕성한 시기의 아이들에게 안전하게 체육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습니다. 이날 오전 9시쯤부터 하얀 태권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학교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승급식 말곤 정규 수업이 없는 날이었는데도 2백 명 넘게 찾아왔습니다. 학교 안은 금세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으로 가득 찼습니다. 영락없는 개구쟁이들이었습니다. 넓은 캠프 안을 신나게 뛰어다니기도 하고, 한 켠에서 발차기 연습을 위한 샌드백을 쉴 새 없이 찼습니다.

학교 밖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원이 따로 없습니다. 사방이 모래뿐인 허허벌판에 슬레이트 철판들로 지은 주거용 가건물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란 기껏해야 벌판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던지는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학교 안은 그야말로 아이들이 내전의 상처를 잊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천국인 셈입니다.

취재 중인 제게 먼저 말을 걸어온 10살짜리 여학생인 할라 아브라함은 3년 전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벌써 밤색 띠를 땄다고 자랑했습니다. 태권도를 배우면 뭐가 좋으냐고 물어봤더니 "학교 밖에선 놀 데가 없고 답답한데, 이곳에선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태권도를 배우고 또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도 있으니 너무 즐겁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실력을 보겠느냐며 그 자리에서 익혔던 품새를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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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아이들이 태권도에 심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더 있었습니다. 바로 하얀 띠에서 검은 띠로 올라가는 시스템입니다. 자신의 띠를 한 단계씩 올리는 건 이 아이들이 느낄 수 있는 제일 큰 성취감입니다. 그렇기에 태권도를 배울 때의 아이들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이들이 한국말로 "태권!"이라며 우렁찬 기합소리를 낼 때마다 가벼운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곳 아카데미는 단순히 태권도 기술만 가르치는 건 아니었습니다. 빨간 띠 이상부터는 자신보다 낮은 띠의 아이들 7명을 맡아서 소그룹 리더 역할을 합니다. 리더는 늘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가르쳐주고 보살피며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검은 띠 이상으로 계속 올라갈 수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요?

처음 난민 캠프에 온 아이들은 오랜 내전과 빈곤에 시달린 탓에 생존본능이 유독 심합니다. 구호물품을 나눠줄 땐 하나라도 더 받고자 남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습니다. 줄 서기와 같은 질서 개념은 전혀 없습니다.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탓에 별것 아닌 일에 폭력성이 분출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차량에 이유 없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이들도 있습니다.

태권도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건전하게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태권도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높은 띠를 따는 데 열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를 보살피고 이끄는 리더십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타인을 살피고 협동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아래 사진은 이날 승급식을 치르기 전 2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줄을 맞춰 도열한 모습입니다. 이런 질서 있는 모습은 몇 년 전만 해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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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3살로, 벌써 검은 띠를 딴 히샴은 "태권도를 배우기 전엔 친구들이랑 여기저기 돌을 던지면서 나쁜 행동을 하고 다녔지만, 지금은 올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태권도를 접하면서 꿈도 가졌습니다. 태권도 사범이 돼 훗날 시리아로 돌아가서 태권도장을 차리겠다는 겁니다. 하얀 태권도복을 입고 다니면 주변 친구들이 부러워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신입 학생들에게 나눠주려고 태권도복 뭉치를 외부 학생들이 몰래 훔쳐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생각난 김에 히샴에게 한국이란 나라를 어떻게 생각나느냐고도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한국도 과거 전쟁을 겪었지만 지금은 잘살고 있지 않느냐"며 "시리아도 이번 내전이 끝나면 한국처럼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건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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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는 매일마다 시리아 아이들에게 태권도뿐만이 아니라, 인성을, 질서를, 인내를, 꿈꾸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워낙 좋아하다 보니 부모들도 한국 학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가 훌륭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교를 설립한 이철수 교장의 교육 철학이 한몫한다고 봅니다. 그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균형 잡힌 시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다각도로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과연 난민에게 필요한 게 뭔지를 성찰한 결과 이러한 교육 방법을 세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구호물품은 난민들의 삶에 순간적인 도움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난민들이 세계의 골칫덩이로 추락하지 않고 사람답게 제구실을 할 수 있으려면 그에 맞는 인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교장은 "지금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리아 난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심점이며, 이를 위해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가르칠 수 있는 리더십을 키워줘야 다시 나라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태권도는 최적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라마단 시작과 함께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는 이제 한 달간의 방학을 맞았지만, 지금도 교문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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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우 기자 eigh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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