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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갈등·불신만 키운 '블랙리스트 조사'... 어깨 무거워진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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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특정 성향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한 문건을 만들었다는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의혹이 불거진 작년 초부터 해를 넘겨 총 세 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됐지만 결론은 같았다.

재판과 법관의 독립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조사였지만, 그 과정에서 법원 내부는 진보와 보수로, 양승태 사법부와 김명수 사법부로 갈갈이 찢어졌다. 그에 따른 사법부 불신도 되돌리기 어려울만큼 커졌다. “문제없다”고 결론낸 1차 조사 결과를 뒤엎고 2·3차 조사를 밀어붙인 김명수 대법원장의 어깨는 한층 무거워졌다.

대법원 산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25일 “행정처가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해 리스트를 작성하여 그들에게 조직적, 체계적으로 인사상의 불이익을 줬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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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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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례 조사 모두 “리스트도, 불이익도 없었다”
블랙리스트 의혹의 발단은 이례적인 인사였다. 법원행정처는 작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으로 발령받은 이탄희(40) 판사를 발령 11일만에 원래 근무하던 수원지법 안양지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 인사를 앞두고 이 판사가 사표를 낸 사실도 알려졌다. 법원의 인사·예산·사법 정책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는 대법관이 처장을 맡고 있고, 차장은 대법원 0순위로 꼽힌다. 판사들 사이에서는 출세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곳이다.

이런 행정처 심의관 자리를 두고 사표를 내고, 원적 법원으로 되돌아 갔으니 여러 말이 나올 법 했다. 이때 한 언론에서 '행정처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다가 인사조치를 당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도했다. 이 판사가 소속된 법관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사법개혁과 법관인사제도'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추진했는데, 행정처가 이 판사에게 학술대회를 못하도록 지시했는데 듣지 않자 인사조치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태 책임을 지고 유력한 대법관 후보였던 임종헌(59) 행정처 차장이 사표를 냈다.

진상조사에 나선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 1차 조사)는 작년 4월 “‘부당한 지시’는 있었지만 보복성 인사 조치를 한 적은 없다”고 결론냈다. 당시 조사과정에서 이 판사가 “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하면서 블랙리스트 의혹이 새롭게 불거졌다. 일선 법원 판사들이 스스로 대표를 뽑아 구성한 전국법관대표회의 등이 추가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해 9월 퇴임을 앞두고 있던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은 “충분하고 구체적인 법적·사실적 근거 없이 조사한다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으로 사법부 수뇌부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추가조사는 시작됐다. 작년 11월 꾸려진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 2차 조사)는 문제의 기획조정실 컴퓨터를 확보해 내부 문서를 조사했다.

조사 과정에서 해당 컴퓨터를 사용했던 법관들의 동의를 제대로 구하지 않아 위법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 대법원장은 형사고발을 당했고, 양 전 대법원장도 ‘블랙리스트’의 배후로 지목돼 고발됐다. 전·현직 대법원장이 나란히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르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또 ‘불이익’의 대상자로 지목됐던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그 전신(前身)으로 알려진 우리법연구회 출신이 추가조사를 주도하면서 편향성 논란도 빚었다. 김 대법원장은 이들 두 연구회의 회장 출신이다. 그러나 2차 조사도 “특정 판사에게 불이익을 준 적은 없었다”며 1차 조사와 같은 결론을 냈다. 오히려 2차 조사를 이끌었던 민중기 판사가 올해 전국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법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법권력 교체를 전후로 한 ‘보혁(保革)’ 갈등으로도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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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블랙리스트’ 추가 조사 필요성을 논의한 전국법관대표회의/조선DB


◇무리한 상고법원 추진, 판사 뒷조사·재판 개입 낳아
이번 조사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두번째 조사 때부터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한 사법행정권 남용 정황이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2차 추가조사위는 “사법 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한 판사들의 이념적 성향과 활동 내역 등에 관한 자료를 폭넓게 수집·분석한 문서”라고 했었다. 당시 조사 범위에 이들 문건의 실제 실행 여부는 포함되지 않았고, 비밀번호 등으로 막혀 확인이 불가능한 문서도 있었다. 결국 3차 조사로 이어졌다.

3차 조사를 위해 올 2월 출범한 조사단은 의혹 문건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 4대에서 406개의 파일을 확보했다. 문건의 작성자와 작성 경위, 보고대상 등을 확인하기 위해 대면조사도 했다.

조사결과 양 전 대법원장이 추진했던 상고법원 도입에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낸 법관들의 성향, 동향, 재산관계 등을 파악한 문건이 확인됐다. 또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협상 전략을 모색한 문건도 나왔다. 조사단이 확보한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방안'과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 전략' 등의 문건에는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박근혜 정부가 관심을 갖는 판결을 조사하고, 판결 방향까지 직접 연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통상임금 적용 범위를 제한한 2013년 대법원 판결을 두고 청와대가 흡족해한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문건, 박정희 정부의 긴급조치 발동에 따른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판사에 대해 징계를 검토한 문건 등 일부 재판개입이나, 인사 불이익을 염두에 둔 정황도 확인됐다.

조사단은 이들 문건을 분석한 A4용지 192페이지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내놓으며 “특정 법관들에게 불이익을 줄 것인지 여부를 검토한 것이나 특정 법관들에 대한 성향 등을 파악하였다는 점만으로도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을 훼손하려는 것으로 크게 비난받을 행위”라고 밝혔다.

다만 조사단은 “재판과정에 행정처가 관여한 정황은 찾을 수 없었고, 문서가 실행된 사례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며 “업무방해나 직권남용 등 범죄 혐의는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해 형사상 조치는 취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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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상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장/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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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대법원장, 법원 내부 갈등 어떻게 봉합할까
조사단은 “이번 사태의 배경은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사법부가 법관들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하기보다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에 안주함으로써 관료제적 경향을 심화시킨 점에 있다”고 분석했다. 상고법원 추진 과정에서 법원행정처가 내부 비판은 멀리하고 성과만 쫓았다는 것이다.

3차 조사 결과를 놓고 보면 김명수 대법원장이 추진해 온 ‘집중된 권한의 분산’은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대법원은 행정처가 도맡다시피 해 온 사법행정에 대해 일선 판사들이 건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올해 2월 상설기구로 만들었다. 블랙리스트’의 진앙(震央)으로 지목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의 규모는 축소했다.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후보자에 대해 대법원장이 후보를 제시할 수 있던 근거를 없애고 후보추천위원회 심사의 비중을 높였다. 사법부 관료화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지목돼 온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도 올해 인사를 끝으로 폐지된다. 1월에 출범한 ‘국민과 함께하는 사벌발전 위원회(위원장 이홍훈 전 대법관)’는 전관예우 근절 등을 통한 사법신뢰 회복 방안을 방안을 연구·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1년 넘게 사법부를 흔들어 온 ‘블랙리스트’ 의혹이 내부에 남긴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조사단은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사법부 안팎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 엄정한 조치를 취하고, 여러 가지 제도개선을 통해 사법부 내부의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지방의 한 부장판사는 “세평(世評) 없는 인사가 어디 있느냐. 균형 잡힌 사법행정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라면서 “결과만 놓고 보면 해야 할 일을 과하게 했다는 수준”이라고 했다. 수도권 한 판사는 “국민들 눈에는 사법부 권력을 두고 판사들끼리 패권다툼을 벌인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며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더 약해졌고 이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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