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화)

평화는 위협, 동맹은 무시…트럼프의 ‘외교 농단’

댓글 2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북 담화·불성실 협상 태도 빌미

정상회담 전격 취소 명분 삼지만

미 ‘리비아 모델’ 언급하며 자극

언론들 “북 화나게 해…긴장 고조”

동맹국 한국도 팽개쳐…“경솔” 비판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6월12일로 예정됐던 북-미 정상회담을 19일 앞둔 24일에도 회담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일들이 이어졌다. 낮에는 세계를 뒤흔든 핵폭탄이 터지던 풍계리 핵실험장이 고작 다이너마이트에 무너졌다. 저녁에는 북한 고위급이 중국 베이징에 왔으며, 싱가포르 북-미 사전 접촉에 참여하는 인사가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한반도가 잠에 빠지려던 밤 10시40분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의 여러 깜짝쇼를 덮어버리고도 남을 내용의 편지를 공개했다. 북쪽의 “엄청난 분노와 공공연한 적대”를 이유로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4·27 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이 새벽잠을 설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번에는 미국 대통령이 문 대통령의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계 지도자들은 “깊은 우려”, “유감”, “실망”을 표했다.

미국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핵 대 핵 대결” 등 도발적 언사를 문제 삼았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의회에서 “계속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며 북한의 불성실한 협상 태도도 회담 취소 이유로 꼽았다. 북한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은 부인할 수 없다. 이근 서울대 교수는 “북이 담화문 형식으로 호전적인 모습을 보인 게 (회담 취소의)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자극적 언사와 혼란에 대한 질타가 나왔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3일 방송 인터뷰에서 ‘리비아 모델’을 띄우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21일 “리비아의 전철”을 언급했다. 로버트 메넨데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24일 “계속 리비아 모델을 언급하는 게 북한으로부터 얻으려는 결과에 이르기 위한 외교적 방법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말로를 연상시켜 북한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리비아 모델’을 자꾸 꺼낸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이 리비아를 더 언급할수록 북한은 더 화가 났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역사를 살펴보면, 리비아는 펜스나 트럼프가 고를 수 있는 최악의 예이며, 이것이 최근 며칠간 다시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대통령이 공개서한에서 핵공격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 놀랍다는 반응도 나온다. 발표가 미국을 비롯한 외신 기자들이 핵실험장 폭파를 취재하려고 방북한 ‘위험한’ 시점에 나왔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북핵 해결을 위해 가장 긴밀히 협력해야 할 동맹국 한국을 철저히 따돌린 것도 문제다. 청와대는 언론 보도가 나올 즈음에야 주미대사관을 통해 백악관 발표 내용을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사전에 암시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발표 시점은 문 대통령이 북-미의 막판 신경전을 가라앉히려고 백악관을 찾았다가 귀국한 지 24시간도 안 된 때였다. 미국이 동맹과 적을 가리지 않고 뒤통수를 때린 셈이다. <뉴욕 타임스>는 이번 발표에 “전세계가 혼란스러워한다”며, 회담 중재역을 맡은 한국과 상의하지 않은 것은 “동맹국에 대한 경솔함”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의 트레이드마크로 인식돼온 ‘벼랑끝 전술’을 펴는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도 동의한 ‘평화, 번영, 안정’이라는 북핵 폐기 목표에 대한 진정성을 더 의심받게 됐다. <엔비시>(NBC) 방송은 그가 북한이 회담 취소를 먼저 발표할까봐 선수를 쳤다고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러시아 게이트’ 수사 등 국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북-미 회담을 서둘렀고, 취소 발표도 정치적 계산의 결과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지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 아침(현지시각)에는 트위터에 “북한으로부터 매우 따뜻하고 생산적인 성명을 받았다는 좋은 뉴스가 나왔다. 우리는 곧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지 볼 것이며, 길고 지속적인 번영과 행복을 가져오길 바란다”고 썼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유화적 담화 내용을 접한 뒤로, 북-미의 ‘롤러코스터 외교’가 이어지고 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사람과 동물을 잇다 : 애니멀피플] [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