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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낙태죄 폐지, 성교는 하고 책임은 안 지는…” 법무부 변론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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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법무부 “낙태죄 합헌” 변론요지서 보내 논란

SNS에 ‘#법무부장관_해임’ 성토 잇따라

24일 오후 2시 헌재서 공개변론 예정



한겨레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주관 '낙태죄 폐지 결의 범시민사회단체 공동기자회견'이 지난해 11월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려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참석해 손피켓을 든 채로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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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소원 공개변론을 앞두고 법무부가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에 대해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인식을 담은 공개변론 요지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임신과 출산으로 여성이 겪게 되는 신체 변화나 사회적 차별을 “낙태죄에 따른 별개의 간접효과에 불과”하다거나 낙태죄 폐지 요구를 마약 합법화 상황에 빗대 설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분노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CBS 노컷뉴스가 23일 입수해 보도한 법무부의 변론요지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관련 논란을 ‘생명권 vs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 전제하고, 여성을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시각은 “통상 임신은 남녀 성교에 따라 이뤄지는 것으로,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라는 문장에도 담겨 있다.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이에 대해 “낙태라는 마지막 비상구를 선택하는 여성도 건강하고 안전할 권리가 있다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법무부는 왜 모르는 걸까요”라고 지적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도 페이스북에서 “법무부는 도대체 어느 시대, 어떤 공간에 살고 있는가. 임신과 출산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낙태하는 여성은 ‘성교는 하되 그에 따른 결과인 임신 및 출산은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반박할 가치도 없는 졸렬한 주장에 입이 벌어질 따름”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여성들의 분노를 자극해 더 강렬한 운동을 촉발하고자 하느냐”고 적었다. 김홍걸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도 페이스북에 “낙태죄 폐지에 대해 이런 황당한 의견을 내는 걸 보니, 법무부는 아직도 박정희·전두환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트위터에는 ‘#법무부장관_해임’ 해시태그와 함께 박상기 법무부 장관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퍼지고 있다. 청와대 누리집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법무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트위터 이용자 Mr***(@One***)은 “검찰 내 성폭력에는 침묵하고, 성소수자 단체에 대한 설립 승인은 방치하고, 임신 중절에는 결사반대를 외치는 집단이 ‘법질서를 확립하고, 인권을 옹호하며, 다양한 법무서비스를 국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임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또 다른 트위터 이용자 미**(@hip**)는 “섹스에 책임져야 하는데 왜 낙태죄는 여자만 처벌하나요? 남자들은 다 아빠 되고 싶은 건데 여자가 이기적으로 혼자 낙태하는 것이라 (그러느냐)”며 “출산하면 남자 강제 부양의무는 왜 없어요? 남자는 친자식 부양 안 해도 처벌 안 받잖아요? 이거 먼저 대답하고 섹스에 책임지라고 말해보세요”라고 꼬집었다.

23일 저녁 청와대 누리집에는 낙태죄 폐지에 반대 의견을 개진한 법무부에 책임을 물어 ‘박상기 법무부 장관 경질을 요구합니다’라는 내용의 국민청원까지 올랐다. 청원자는 “성평등은 시대적 과제라 천명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을 이행하는데 법무부가 남성 중심적 판단을 내린 사실에 대해 청와대가 답변 혹은 처분을 통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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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기 법무부 장관.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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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는 논란이 확산하자 24일 설명자료를 내고 “낙태를 원하는 여성을 무책임한 여성으로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면서도 “태아의 생명권은 성장 상태와 무관하게 보호돼야 할 중대한 기본권이고, 현행법상 낙태를 일부 허용하는 등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과잉제한 되고 있지 않으므로 낙태죄에 대해 합헌 의견을 개진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법무부는 또 “낙태죄에 대한 논의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라고도 했다. 아울러 “(헌법소원을 낸) 청구인이 낙태를 형사처벌하는 경우 불법시술이 만연해 여성의 건강권이 침해된다는 취지로 주장했는데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라며 “논리적으로 부당하다는 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마약 관련 내용을 비유한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낙태 허용이 여성이 임신으로 인해 겪게 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낙태 허용 시 △낙태율 급증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훼손 △생명경시 풍조 확산 등 오히려 더 큰 사회적 병리 현상이 초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무부의 설명자료가 오히려 임신과 출산, 낙태에 대해 후진적인 시각을 재차 보여줬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낙태를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 한정 지은 시각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된다. 낙태죄 폐지운동에 나선 이들은 ‘생명권’이 단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의 생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후 삶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하며, 낙태를 ‘국가 대 생명’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가 태어난 이후 아이와 여성의 삶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환경에서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의제행동센터장은 “임신중지에 대해 고민하고 내리는 결정은 가족, 경제적 상황, 건강상태, 상대 남성과의 관계, 양육능력 등 굉장히 많은 것을 고려하고 내리는 판단”이라며 “‘생명권 대 선택권’ 프레임에서는 그런 맥락이 삭제되고,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모두 전가해버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또 “아이가 태어나서 생명으로 살아갈 조건을 국가가 책임지고 있지 않은 문제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 “낙태죄의 숨은 죄인은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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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를 위한 여성 검은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의료인 처벌을 강화하는 정부의 입법예고를 규탄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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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촉구해온 여성모임 ‘비웨이브’(BWAVE·BlackWave)는 제대로 된 피임 교육조차 이뤄지지 않는 사회에서 결과만 처벌하는 것이 온당한지 의문을 제기했다. ‘비웨이브’는 “질외사정 같은 피임률이 낮은 방법이 남성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60%나 육박하는 상황에 피임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돌리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다”고 반문했다.

이들은 현행 모자보건법의 ‘낙태죄 처벌 예외 사유’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현재 강간으로 인한 임신의 경우에는 낙태가 법적으로 보장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는 강간죄가 첫 번째 판결에서 확정될 때까지 약 3년의 시간이 소요되고, 재판 과정에서 범죄 혐의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하는 여성들은 낙태죄 예외 항목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비웨이브’는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여성이 가져야 할 ‘근본적 권리’로 본다. OECD 30개 회원국 중 23개국이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태아가 인간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견해가 대립한다. 하지만 여성이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원치 않는 출산을 한 자들의 기본 생존권이 보장받는지 불분명한데도 양육을 강요하면 과연 그렇게 생겨난 가정은 행복할 것인가 의문이 든다”고 덧붙였다.

법무부의 입장은 다른 정부 부처나 국회 등과 비교해서도 후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여성가족부는 최근 정부 부처 가운데 처음으로 ‘낙태죄 재검토’를 명시한 의견서를 헌재에 제출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 소장은 지난해 인사청문회에서 “임신한 여성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낙태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을 태아의 생명과 충돌하는 가치로만 볼 것이 아니다”라며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했듯이 일정한 기간 이내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조국 청와대 정무수석은 지난해 11월 청와대 누리집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현행 법제는 (낙태죄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에 불법 임신중절 수술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 여성의 건강권 침해 가능성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말해 낙태죄 폐지에 힘을 실은 바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지난 1일 ‘낙태죄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명시한 보고서를 펴내고 “임신·출산을 직접 체험하고 생명과 스스로의 처지 사이에서 고민할 여성의 입장에서 낙태 문제를 바라본다면 헌법적 담론의 차원에서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낙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설득력이 있다”고 밝혔다. 또 “강력한 낙태 규제가 위험한 방법으로 낙태를 하도록 내모는 형국”이라며 “현행법상 낙태는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되기에 상담제도 등의 마련은 물론 낙태 관련 규정의 정비도 부족할 뿐 아니라 비의료기관 혹은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의료적 환경에서 음성화된 시술이 만연됨으로써 임부의 건강·생명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도 지적했다. (▶관련기사 : 국회 입법조사처 “낙태죄 규제 완화” 첫 보고서 냈다)

앞서 헌재는 2012년 8명의 헌법재판관이 합헌 의견과 위헌 의견 사이에서 팽팽하게 대립한 끝에, 합헌 의견 4 대 위헌 의견 4로 낙태죄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위헌’ 결정이 나오려면, 의결 정족수인 6명이 같은 의견을 내야 한다.

박다해 박수진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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