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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적폐 트라우마’에 갇힌 국민연금… 해외 투기자본 입김만 세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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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구조 개편 캐스팅보트 딜레마

“우리가 3년 전에 제기했던 문제가 여기 그대로 있다.”
이달 11일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은 현대자동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 반대 설명 자료에 뜬금없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례를 들고나왔다.

이날 발표는 엘리엇이 4월부터 현대차그룹에 지주사 전환 등 각종 요구를 해오다가 현대차 측이 받아들이지 않자 반대표를 던지겠다며 내던진 마지막 공격이었다. 금융권과 재계에서는 이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했다가 홍역을 치른 국민연금공단의 ‘적폐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행동으로 봤다. 국민연금은 현대모비스와 글로비스의 분할 합병을 핵심으로 하는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안 주주총회 통과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

결국 상황은 엘리엇 뜻대로 흘렀다. 21일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 주총을 일주일 앞두고 지배구조 개편안 잠정 중단을 발표했다.

○ 캐스팅보트 쥔 국민연금의 ‘적폐 트라우마’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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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엘리엇이 시작했지만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 잠정 중단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상 국민연금이었다는 게 재계 안팎의 평가다. 이달 중순 엘리엇의 공격 이후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두 곳이 모두 반대 권고안을 냈다.

이는 2015년의 ‘악몽’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결의 당시 ISS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반대 권고안을 냈다. 하지만 당시 20여 개 증권사 중 19곳의 애널리스트는 찬성했다.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이었다. 국민연금은 결국 찬성표를 던졌다. 합병은 성사됐지만 이듬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며 합병 찬성은 ‘적폐’로 몰렸다. 당시 찬성 의견을 주도했던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장 등이 줄줄이 구속됐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가 반대 권고안을 낸 상태에서는 국민연금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국민연금과 현대차그룹 모두에 부담이 컸다”고 말했다. 현대모비스 2대 주주인 국민연금(9.8% 보유)이 반대하면 주총 통과가 어렵고, 찬성하면 법적 정치적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는 얘기다.

국민연금은 2015년 사태 이후 주요 안건에 대한 주도적인 결정을 피하고 있다. 현대차 안건은 외부 자문기구인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넘긴 상태였다. 복지부는 최근 의결권행사 지침을 개정해 의결권행사 전문위 위원 3명 이상이 요청하면 국민연금 측의 위임이 없더라도 전문위가 자체적으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전문위는 외부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상설 기구가 아닌 데다 전문성이 떨어질 수 있고, 여론 등 주변 상황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혁신팀장은 “공적연금은 사모펀드와 달라야 한다. 국민의 돈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투자 차원에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해야 한다”며 “정부와 여론의 눈치를 봐서도 안 되지만 사후에 책임을 물어서도 안 된다. 사후 판단으로 책임을 물으면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 엘리엇, 적폐 트라우마 교묘히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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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국민연금이 적폐 트라우마에 발목을 잡힌 사이 엘리엇 같은 단기수익을 노리는 헤지펀드와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의 영향력만 커졌다는 점이다. 국민연금은 국내 4대 그룹 지분의 약 6∼9%를 보유하고 있는 등 사실상 주요 안건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 국민연금 결정은 국내 기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국내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2015년 이후 국민연금뿐 아니라 국내 의결권 자문사나 투자자도 해외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실체가 뭐든 간에 글로벌 권위에 기대는 게 사실상 안전한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엘리엇은 현대차그룹 계열사 중 현대차, 기아차, 모비스 등에 지분 약 1.5%만 보유하고 있다. 미미한 지분을 가진 엘리엇이 이번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 향방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것도 한국의 ‘적폐 트라우마’를 교묘히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엘리엇은 꾸준히 삼성물산 사태 프레임을 앞세웠다. 세계 2위 의결권 자문사 글래스루이스는 자사 보고서에 이 같은 엘리엇의 논리를 그대로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엇은 동시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입었다며 이달 초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절차를 시작하며 추가 압박에 나섰다.

국민연금의 운신 폭이 좁아진 상태에서 한국 기업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만한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앞으로 엘리엇은 한국 기업에 틈만 보이면 사사건건 나설 텐데, 차등의결권 등 한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한국 기업 보호를 오너 보호로 몰아붙여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현수 kimhs@donga.com·변종국·김성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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