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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놀고 먹으면 어때!’ 독립영화의 시원한 전복적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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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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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19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성황리에 폐막했다. 이 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는 나는 이 축제의 외형적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매년 영화제를 왜 하는가 하고 자문하곤 한다. 물론 이 일이 주는 보람과 고통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걸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지만 대학에서 가르치는 본업이 있는 마당에 영화제 일의 명분이 흐릿해지면 바로 그만두겠다고 다짐하는데도 매년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요즘 같은 다매체 시대에 영화제는 점점 낡은 플랫폼이 돼가고 있지만 그래도 영화다운 영화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플랫폼은 여전히 영화제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영화제는 곧잘 스타들의 화려한 레드카펫 행사와 동일시되는 세속적인 행사지만 정작 영화제에서 트는 대다수의 영화는 세상의 속물적 경향에 침을 뱉는다.

전주의 지역 언론에서는 유명 스타나 감독 대신 젊은 감독들과 배우들이 주 게스트인 전주국제영화제를 두고 지역 행사에 불과하다고 늘 비판하지만 나는 이 영화제가 자랑스럽다. 올해 역대 최다 관객 동원 수를 앞에 두고 이 관객들과 한국의 영화 문화를 바꾸는 가장 역동적인 방안은 무엇인가를 궁리한다. 역시 중요한 것은 영화제가 선정한 작품들일 텐데 이 작품들에 참여한 영화인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영화계의 주류가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상상한다. 올해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한국 영화들의 경우, 당장 그 답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제 상영작 모두 상업영화들과 달리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아부의 기색이 없으며 정직하고 꾸밈이 없다. 현실의 반영이라는 테제에 충실하되 그게 혹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더라도 관객과 대결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영화들이다.

그런데 대다수 한국 독립영화는 주인공들을 피해자 서사의 위치에 두고 있었다. 헬조선으로 부정되는 한국의 현실에서 그들은 부조리한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절망의 바닥에 이르러서도 아직 바닥을 치지 못했다고 증언하는 이 영화들을 보며 나는 혹 이것이 어떤 경향성에 함몰된 결과는 아닐까 회의에 빠졌다.

올해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은 정형석 감독의 <성혜의 나라>는 그런 점에서 강력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성추행을 당한 뒤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둔 주인공 성혜가 온갖 단기직으로 생활하는 모습이 상영시간 절반에 해당하는데 일하고 걷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따위의 일상적인 움직임의 단위들이 깊은 영화적 인상을 준다. 사건이 소소하고 극적 파장이 거의 없는데도 노동하는 일상을 특권적으로 포획하는 카메라가 대단한 기세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반전은 감독의 의지가 세게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긴 하지만 그것대로 또한 충격적이다. 주인공 성혜는 어떤 예기치 않은 일로 거액의 보험금을 받게 되는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결단을 내린다. 남은 삶을 노동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이 영화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 피해자 서사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삶을 상상하는 이 영화를 통해 나는 한국 독립영화계에서도 다른 유형의 전망이 싹트는 게 아닌가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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