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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강남역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 걸린 우리사회 축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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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균 기자의 현장보고] 정동청 원장의 강남역 치료 1년

한국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만나 수도권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사람과 차량이 몰리는 곳. 전국 각지에서 오는 차량도 많아 비단 출퇴근 시간이 아니더라도 끔찍한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곳. 매일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오가고 마천루의 네온사인으로 밤을 잊은 곳. 그리고 빌딩숲 사이를 비틀거리는 불안한 그림자의 행렬이 넘실대는 곳, 이곳은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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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에 어둠이 깔리고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즐비한 술집에선 온갖 사연이 차고 넘친다. 회사에서 막말을 일삼는 김 부장을 원망하는 직장인의 한탄과, 도통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는 남편의 뒷담화를 늘어놓는 직장맘, 올해 공무원 시험 경쟁률을 고민하는 취준생까지 밤이 깊어갈수록 이들의 답답함은 알코올과 뒤섞여 씁쓸한 맛을 자아낸다.

물론 취기는 돌아도 고민은 여전하다. 술 한 잔을 꿀꺽 삼키고는 '약해지는 것은 지는 것'이며 '내일도 버티자'며 의지를 다진다. 삶은 고해란 것을 인정하듯 사는 게 이렇다며 참자, 삭히자를 연발해본 경험일랑 한번쯤은 있었을 터다. 그럼에도 술이 주는 객기나 일시적 망각이 근본적인 치유와는 별개의 것임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어슴푸레 어둠이 깔린 시각 정동청 원장(41)은 병원 문을 잠그고 건물을 나섰다. 한손에 외투를 쥐고 다른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뱃불을 붙여 후 하고 뱉자 연기는 도로변의 매연과 섞여 사라졌다. 고된 진료 후 그가 피우는 담배는 그만의 '의식'과도 같다. 그는 정신과 전문의다.

'강남역이란 곳이 변화가 큽니다. 미래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경쟁도 과도하죠. 현대인의 갈등과 스트레스는 상당합니다. 정신적 고통을 토로하거나 도움을 받을 곳이 요원하단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세태에서 지인에게 고충을 토로하고 위안을 받기 어려운 시대가 돼버린 것이죠.'

정동청 원장은 대구 출신이다. 대학 입학 후 상경한 정 원장에게 강남역은 형형색색의 빛으로 가득 찬 '정신없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이곳에 그가 터를 잡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지난해 3월 서울청정신의학과를 열고 환자들을 만나면서 그는 화려한 강남의 이면이란, 실상은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군상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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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버티다 병 되건만

올해 들어 강남역 인근에는 네 곳의 정신과 의원이 문을 열었다. 병원을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일 터다. 사실 현 2030세대는 극도의 불확실성에 고통 받고 있다. 앞날에 대한 불안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한숨 돌릴 여가생활은 커녕 일에 치여 매일을 감내하는 이들 중에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함에 시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빈번한 질환이 우울증과 공황장애. 서울청정신의학과에 찾아오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정동청 원장은 병의 원인이 짐짓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일과 양육의 어려움, 이별, 결혼 생활에서의 갈등 등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각종 고민의 사연들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속으로 삭히거나 참다가 병을 키우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특히 정 원장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환자의 70%는 이삼십대에 이를 정도로 젊은 층은 우울과 공황장애 등 정신과적 질환에 취약한 상황이다. 과도한 경쟁을 요구받아온 그들에게 '요즘 젊은 것들은 끈기가 없다'고 혀를 끌끌 차는 어른이 많을수록 갈등과 반목은 커지고 덩달아 병도 악화된다.

정 원장의 말이다. '회사원들, 특히 남성들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 힘겨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 외엔 회사 스트레스를 해소할 이렇다 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운동 등 취미생활을 가질 것을 제안하지만, 직장인들은 쉽사리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강남역에는 금융, IT 등 여러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회사의 수만큼 거기에 속한 회사원들의 고충도 각양각색이다. 일이 스트레스가 되다 못해 자살의 동기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사실 새롭지 않다. 최근 흔 스타트업 대표의 거친 갑질이 물의를 일으킨 사례만 봐도 회사의 규모가 크건 작건, 직원 수가 많건 적건, '회사'란 괴물은 그 구성원들을 고통스럽게 짓누를 때가 적지 않다.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한다고 스스로 억누르다 발병한 공황장애에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공황장애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가하면 일과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직장맘들의 고충도 상당하다. 가사와 육아란 여성의 전유물인 냥 여기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탓에 직장맘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있다. 온종일 회사 일에 치여 퇴근,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스트레스의 '제2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이 숨 쉴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없다. 우울증을 호소하는 직장맘이 많은 이유다.

공무원 시험 수험생 등 취업준비생의 고충도 이들 못지않다. 극심한 취업난에 안정적인 직장으로 공무원이 각광을 받은 지 오래.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더 이상 노력 여하의 문제가 아니다. 시험 준비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해도 합격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취업준비생들은 지쳐간다. 앞날의 불확실함과 주변의 기대는 이들을 무겁게 짓누른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이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한다.

'그깟 공무원 시험이 뭐라고 합격을 못하느냐'는 잔소리에 청년들도 할말은 있다. 기성세대는 지금과 같은 저성장의 늪을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고성장을 기록했던 과거의 기억,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자릴 잡는다는 믿음을 신봉한다. 그러나 현 젊은 세대에게 다시 그러한 시절이 도래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한 가족 안에도 이러한 시각차로 인해 소통이 원활치 않다. 불화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다시 우울증으로 악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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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강남에 척을 둔 회사원, 취업준비생, 직장맘 등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비틀댄다. 판단과 결정의 기준에는 '나'보다 '부모', '가족', '친지'가 자리 잡는 탓에 열심히 살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다. 쫓기듯 살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아도, 이마져도 질환으로 인지하지 못해 병이 악화된 후에야 정 원장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남 탓하는 이들이야말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바꿔 말하면 스트레스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찾는단 이야기다. '네가 잘하면 그러겠니'라거나 '평소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따위의 조언을 가장한 폭력을 유년부터 강요당해 온 탓이다.

강남역에는 오늘도 숱한 이들이 바삐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할 것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을 가기 위해, 첫 출근을 하거나, 해고를 당해 터덜터덜 역 주변을 서성이는 이들까지 강남역 10번 출구는 각자의 사연을 지닌 이들로 가득할 것이다. 정동청 원장은 말한다.

'우리사회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져있습니다. 좋은 자녀,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언제나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며 사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마저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부당한 요구를 유발시킨 이유는 본인에게 있다고 괴로워하면서 말이죠.'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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