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후마니타스연구소 답사팀…중국 석굴·고건축 예술기행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불기 2562년 ‘부처님오신날’이 밝았다.
2500여년 전 구도의 고행길, 그 긴 수행의 끝에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가르침, 그 참뜻을 새삼 되새기는 날이다. ‘참나’를 찾지 못한 중생들은 지금도 번뇌에 시달린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의 ‘탐진치’(貪瞋癡)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탐욕은 채워도 채워지질 않으니 더 욕심을 내고, 사랑하기도 짧은 인생에서조차 미워하고 화를 낸다.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한 숱하다. 더 나은 삶과 사회, 더 자비로운 세상을 위한 ‘깨달은 자’ 붓다의 지혜를 간절히 염원한다.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가 마련한 ‘중국 석굴문화와 고건축 예술기행’ 답사가 부처님오신날인 22일까지 이어지고 있다. 37명의 경향신문 독자들로 구성된 답사팀은 지난 17일 한국을 떠나 중국 문명의 고도인 허난성 뤄양(洛陽)에 첫발을 내디뎠다. 룽먼(龍門)석굴, 명품 당삼채 소장으로 이름난 뤄양박물관,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불리는 바이마쓰(白馬寺) 등을 탐사한 답사팀은 이후 북쪽으로 올라가며 산시성의 불교유적과 명승지를 돌아봤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황하의 혼’이라 불리는 후커우(壺口) 폭포, 2000여구의 소조상으로 가득찬 솽린쓰(雙林寺), 명·청나라의 도시가 오롯이 남아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핑야오 고성(古城)’을 들렀다. 이어 중국 4대 박물원의 하나인 산시박물원, 중국 최고·최대의 목탑인 잉셴(應縣)목탑 등을 살펴봤다. 21일에는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수도였던 다퉁(大同)의 윈강(雲岡)석굴을 찾았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룽먼·윈강석굴, 신앙과 문화유산의 힘
‘낙양’으로 친숙한 허난성 뤄양
중국 3대 석굴인 룽먼석굴 있어
높이 17m 봉선사동 본존불은
측천무후 모델설로 주목 끌어
우리에겐 아직 ‘낙양’으로 친숙한 뤄양은 중국의 대표적 고도다. 선사시대 유적지부터 주(周·동주)나라, 후한, ‘삼국지’ 주역의 하나인 위(魏)나라, 화북지역을 장악한 북위(北魏)가 후기에 수도로 삼은 곳이다. 중국사를 이끈 나라들의 흥망이 도시 곳곳에 지금도 아로새겨져 있다. 또 고사 ‘낙양지가’(洛陽紙價)의 무대이자 숱한 무덤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북망산’이 북쪽에 자리한다. 북송시대 역사가 사마광의 “고금의 흥망사를 알고 싶다면 낙양성을 살펴보라”는 말은 낙양이 차지하는 문화적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17일 찾은 뤄양은 중국 화북지방 분지 특유의 후텁지근한 날씨다. 뤄양을 대표하는 꽃이자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이 다양한 형식의 시각예술품으로 도심 곳곳에 장식돼 마치 답사팀을 환영하는 듯했다. 뤄양에는 무엇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중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교유적지 룽먼석굴이 있다.
답사팀이 룽먼석굴을 찾은 18일 오전 10시, 안개비가 흩뿌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국내외에서 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둔황 막고굴’ ‘윈강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사원인 룽먼석굴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었다. 답사객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미, 인간의 절절한 신앙의 힘이 온몸에 흠뻑 젖어들었다.
룽먼석굴은 북위 후기 때인 5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수·당나라로 이어지면서 400여년 동안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조성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장하게 흐르는 이허(伊河)를 중심으로 서쪽 용문산의 거대한 암벽을 뚫어 조성한 것이 룽먼석굴, 건너편 향산에 만들어진 게 둥산(東山)석굴이다.
중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룽먼석굴은 약 1.5㎞ 길이에 이르는 바위절벽에 석굴과 불상이 있는 불동(佛洞)·불감이 3600여개, 불탑이 50여기, 크고 작은 불상은 무려 10만여구에 이른다. 불상의 크기는 2㎝부터 17.14m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다. 그야말로 굳건한 믿음, 간절한 염원들이 용문산을 석굴들로 수놓았다. 그 많은 석굴들 가운데서도 조성 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보이는 고양동(洞), 선무제가 발원한 남·북·중동 3개 석굴로 구성된 빈양삼동, 당나라 고종의 칙명으로 이뤄진 봉선사동이 대표적이다.
답사팀을 이끈 실크로드 고고미술 전문가 민병훈 박사는 “빈양동의 3개 석굴 중 불상의 법의 등 양식으로 볼 때 중앙에 자리한 빈양중동이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빈양중동의 본존불은 북위시대 불상의 걸작 중 걸작으로 고졸한 미소가 압권”이라고 설명했다. 민 박사는 “대좌 양식 등은 한국의 삼국시대 대표적 걸작인 국보 78호·83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봉선사동은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석굴이다. 비로자나불로 여겨지는 본존불의 높이가 17여m에 이른다. 특히 본존불은 스스로 황제에 오른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거나 일부 형상화한 것 아니냐는 주장들로도 이목을 끌고 있다. 중국 용문석굴연구원은 최근 펴낸 <용문석굴 100문>에서 ‘측천무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얼굴이 남성·여성적 요소가 융합돼 중성적이며, 조성 당시 거금을 시주하고, 여러 방식으로 조성에도 개입했다는 점 등을 꼽았다. 책에는 본존불의 얼굴을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근접 촬영한 사진도 수록했는데, 정면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여성적 요소가 물씬 풍긴다.
산시성 윈강석굴은 북위 때 조성
담요오굴은 5명의 황제 형상화
지배 위해 황제와 부처를 동격시
민초들이 불심 새긴 흔적도 많아
윈강석굴은 산시성 다퉁 외곽의 무주(武周)산 남쪽 기슭 암벽에 조성됐다. 현재 250여개의 석굴에 불상 등 모두 5만1000여기의 조각상이 있다. 선비족의 북위는 439년 여러 나라들을 평정, 마침내 화북지역을 통일하고 다퉁(당시는 평성)에 수도를 삼았다. 윈강석굴은 북위의 다퉁시기 작품이다. 북위는 이후 493년에 뤄양으로 천도하는 데 뤄양시기에 조성한 것이 룽먼석굴이다.
21일 찾은 윈강석굴. 룽먼석굴보다 한산했지만 역시 장엄한 석굴사원이다. 윈강석굴의 얼굴은 ‘담요오굴’(曇曜五窟)로 불리는 5개의 석굴이다. 북위 황실의 적극적 후원으로 탄야오(曇曜) 스님이 주도, 460년부터 520년대까지 60여년에 걸쳐 조성했다. 담요오굴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황제와 부처를 동격시하는 ‘황제즉여래’ 사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불상들은 높이가 10m가 넘고, 강건한 남성적 신체에 이목구비가 뚜렷해 마치 관람객을 압도하는 듯하다. 실제 담요오굴의 본존불들은 태조인 도무제 등 5명의 황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 북위는 사회통합을 위한 통치이데올로기가, 불교는 당시 도가사상이 지배적인 분위기에서 황실의 후원이 필요했다. 권력과 종교가 유착하며 ‘윈윈’한 셈이다.
민 박사는 “인도나 서역 석굴사원이 예배처나 수행처의 정체성을 지녔다면 윈강석굴에서는 ‘황제즉여래’를 통해 국가지배체제 논리가 구현된 호국불교로 바뀌었다”며 “석굴의 양식, 성격도 변해 윈강석굴은 석굴문화사에서 ‘윈강양식’을 낳았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곳곳에 인도와 서역, 나아가 헬레니즘적 요소도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윈강·룽먼석굴은 불교라는 종교를 넘어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인도와 서역, 중국적 특성이 서로 어우러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석굴은 황제나 고위 관료들이 발원한 거대하고 웅장한 불상으로 특히 유명하다. 하지만 소박한 석굴, 불감, 신앙심의 흔적들이 더 많다. 비록 작고 투박하지만 민초들이 자신의 불심을 바위에 깊게 새긴 것이다. 그야말로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이다. “이렇게까지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일까”라는 원초적 질문을 낳는 룽먼·윈강석굴. 그래서 그 울림은 깊고, 여운은 길다.
■ 석굴암의 가치를 되새기다
인도에서 처음 시작된 석굴문화
서역·중국 이어 한반도로 전래
동서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유산
석굴암에서 재창조의 의미 확인
석굴사원은 기원전 4세기쯤 인도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더위를 피하는 수행공간이자 예배공간으로 탄생한 것이다. 불탑, 불상 등을 안치하고 장엄하니 바위동굴은 신성한 석굴사원으로 거듭난다. 석굴문화는 불교를 따라 서역, 중국, 적어도 8세기에는 한국으로 전래되기에 이른다. 당초 자연동굴에서 시작됐으나 룽먼·윈강석굴처럼 바위를 뚫어 만든 인공적 석굴, 한국의 석굴암처럼 축조한 석굴로 진화한다.
석굴문화는 불교건축이면서 조각이자 회화, 공예 등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석굴도 불탑, 불상 등 여느 불교미술처럼 지역과 시대에 따라 그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대의 역사, 문화를 살펴보는 데 더없이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동서 문화교류의 상징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당시 룽먼석굴은 ‘석굴 조각들은 인간의 예술적 창조성이 훌륭하게 발현된 걸작’ ‘오랜 기간에 걸쳐 확립된 예술양식의 완전한 경지를 보여준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아시아 문화적 발전 과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꼽혔다.
룽먼·윈강석굴을 답사하다 보면 한국의 석굴사원이 떠오른다. 경북 군위의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국보 109호)과 ‘석굴암’으로 부르는 ‘석굴암 석굴’(국보 24호)이다.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은 팔공산 자락 동굴에 석조 아미타여래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석굴암보다 더 이른 7세기 후반~8세기 초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굴암보다 앞서 만들어진 데다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줘 불교미술, 문화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평가받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동아시아의 걸작으로까지 인정받는 석굴암은 8세기 후반 조성됐다.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하고 그 주위 벽면에 40구의 불상을 조각했다. 본존불은 더 설명할 필요 없이 숭고미의 전형이라 할 정도로 관람객을 숙연하게 만든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인도에서 시작된 석굴문화가 실크로드를 타고 마침내 신라 땅에 이르렀고, 신라인들은 그 문화를 적극 수용했다. 그러고는 외래문화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고유한 특성을 융합시켜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석굴암’을 탄생시켰다. 특히 석굴암은 규모 면에선 중국 석굴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예술성만은 국제적으로도 높이 인정받는다. 룽먼·윈강석굴을 답사하며 석굴암의 가치, 이 시대 문화의 수용과 변용, 나아가 재창조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뤄양·다퉁(중국) | 글·사진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 [인기 무료만화 보기]
▶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