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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임철영의 청경우독] 만사형책(萬事亨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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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책으로 통한다

- 하루 200권씩 신간…성인 독서율 최저

- 책읽기는 저자의 권위·강박 탈출부터

- 책와 화해하기·마주하기·사귀기·헤어지기로 구성

- 독서의 완성은 책을 죽이고 넘어서기

아시아경제

[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 "책을 읽되 그냥 눈으로 읽기만 하는 것은 하루의 책 1000권, 글 100편을 읽을지라도 되레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 게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한 글자라도 그 올바른 뜻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있거든 두루 찾아보고 깊이 연구해서 근본 뜻을 밝혀 알아내야 전체 의미를 환하게 알 수 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이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전한 여러 편지글 중 일부다. 그는 처조카 황사영의 백서사건(帛書事件)에 연루돼 귀양살이를 시작한 전라남도 강진 유배지에서 "연아야 유아야 보거라"로 시작하는 편지로 수없이 올바른 책읽기를 주문했다. 약 220년 전 아버지의 유배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염려, 때로는 꾸짖으며 강조한 정약용의 책읽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정독(精讀)', '질서(疾書)', '초서(抄書)'로 정리됐다.

책읽기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화두다. 매년 성인의 독서량을 다루는 통계가 나오고 미국, 유럽 등 이른바 선진국 성인들의 독서량과 비교하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보도가 나오기도 한다. 저자의 대중성에 기댄 추천도서, 책을 효율적으로 읽는 법을 다루는 자기계발서만 수백, 수천여종에 달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구체적인 화두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듯싶다.

시공을 초월한 화두의 범람과 실질은 괴리가 크다. 2016년 연간 신간 도서 발행량은 7만5727종이었다. 하루 평균 200권 이상의 신간이 쏟아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독서율은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다. 2017년 성인의 40%가 일 년 동안 책 한 권을 읽지 않았다. '책혐시대의 책읽기'의 저자 김욱은 "우리시대의 대세는 시공을 초월한 스마트폰 들여다보기이며, 어느 측면에서 우리는 지금 '책혐시대'에 살고 있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펼친다.

저자는 책혐시대의 세태를 이렇게 요약한다. 책을 혐오하는 시대의 다수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책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좋은 책을 읽더라도 읽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책읽기를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책은 적어도 '책'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물건을 읽은 그들은 그저 흰 종이 위의 검은 글자를 훑고 지나간 사람들이 될 뿐이다. 적나라한 묘사다.

사실 '책을 꼭 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답하기 어렵다. 책에 대한 혐오에 시비를 가리는 것은 애초부터 멍청한 짓일 수도 있다. 책읽기는 선택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며 그것이 의미를 가졌을 때 비로소 행위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근본적일 수 있는 이 물음에는 직접 답하지 않는다. 대신 책은 '생각의 진화과정'이며 이를 따라 나와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족할 뿐이라고 언급한다. "시답지 않은 책이어도 좋다. 자신의 삶을 담은 이야기를 담은 책을 찾아 이것저것 골라 읽다 보면 '낭비'하는 가운데 좋은 책을 만나게 되고, 좋은 책은 자신의 시야를 넓혀 또 다른 좋은 책으로 안내할 것이다."

결국 책읽기의 의미는 책을 쓴 저자의 권위와 책읽기의 강박을 벗어나 책 읽는 자신의 목소리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책읽기 행위에서 문제의 핵심은 각 분야의 저자가 서술한 훌륭하고 신뢰할만한 생각을 자기 머릿속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설픈 자신의 생각을 책읽기라는 과정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만드는 데 있다.

책읽기 강박이 야기한 대표적인 부작용은 '명구 찾기'다. 자칭 타칭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책읽기를 유명한 문구를 취하기 위한 일로 착각하는 현상이다. 이는 지적 능력을 과시하려는 속물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권위에 권위 있는 인물의 논리를 더하는 기계적 습관은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 링컨의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니체의 '신은 죽었다',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매우 악랄한 왜곡을 거쳐 우리에게 주입됐다.

책이라는 존재에 부담을 덜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편견을 깨는 노력이다. 살아가면서 주입된 어떤 사고를 깨는 책은 가장 유용할 수 있다. 책 읽기는 사고를 확장하면서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만들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그랬고,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제주 4.3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순이삼촌', 루쉰의 '아Q정전' 등이 그렇다. 저자는 "어디서 시작하든 책읽기가 일상처럼 장기간 지속될 경우 우리는 거의 모두 생각의 광장에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상상하면 각자는 모든 관심사와 입장에 대해 민주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책의 상상적 역할이다."

저자는 '책혐시대의 책읽기'를 '책과 화해하기', '책과 마주하기', '책과 사귀기', '책과 헤어지기' 총 4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저자는 책과의 화해와 마주하기를 통해 심리적 무게를 덜고 온갖 왜곡과 특정 분야 전문가들의 교양의 무지와 백치를 걷어내면,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책과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의 다양한 교집합이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도덕책, 역사책, 철학책, 사회과학책, 자연과학책, 문학책, 예술책, 심리학책의 사례를 들어 각 분야에서 저자 자신이 관련된 책과 사귀게 된 일련의 흐름을 드러낸다.

도덕책 읽기에서는 키케로의 '키케로 의무론'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등이 등장한다. 자연과학책에 읽기에서는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카 세이건의 '코스모스', 스티븐 호킹의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등 반가운 저서들을 소개한다.

나아가 저자가 제시한 명분으로써 책읽기는 귀 기울일만하다. 저자는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말한 고위 관료의 발언을 이용해 여기에 흥분만 할 게 아니라 우리가 개돼지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보다 나은 민주주의의 지배자로서 소수의 엘리트들이 감당했던 수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책임 있는 권력을 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어짐. 무엇이든 잘 헤어지는 게 중요하다. 연인이든, 친구든, 책이든. 특히 책읽기는 헐거운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탄탄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수단이며 지혜에 이르는 과정이기에 그렇다. 저자는 말한다. "지식을 지배하는 지혜의 주인이 돼야 하며 과거의 지식을 담은 가장 사랑하는 책을 만나 그 책을 죽여야 한다."

올해는 25년 만에 지정된 '책의 해'다.

아시아경제

김욱 지음/개마고원/1만5000원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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