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45188260 0182018051745188260 07 0701001 5.18.1-RELEASE 18 매일경제 0

신라 진흥황 순수비를 통해 분석해본 고구려의 대외전략

글자크기
[고구려사 명장면-45] 6세기 고구려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장면들 중에는 한순간에 한강 유역을 잃게 되는 다소 당혹스러운 역사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고구려의 또 다른 저력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역사적 장면에는 신라를 고구려, 백제와 힘을 겨룰 수 있는 나라로 만든 명군주 진흥왕(~576)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그리고 그런 진흥왕을 적절하게 이용한 고구려의 녹록지 않은 외교 전술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모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재위 12년인 551년 정월에 친정(親政)을 시도하였는데, 아직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진흥왕은 그해 백제 성왕과 동맹하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시 성왕의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재위 기간이 29년이니,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진흥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런 성왕과 손을 잡고 과감하게 고구려 공격에 나섰으니, 진흥왕은 시국을 읽는 안목과 결단력이 뛰어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진흥왕은 한강 상류 유역을 차지하자마자 곧이어 성왕과 맺은 동맹을 깨뜨리고 거꾸로 백제를 공격하는 변신을 꾀하였다. 좋게 말해 전략의 변화이지 한마디로 배신이었다. 노회한 성왕이 새파란 나이의 진흥왕에게 농락당한 셈이다. 사실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와 신라가 차지한 한강 상류는 그 가치가 전혀 달랐다. 한강 상류 땅에 만족한다면 신라로서는 백제가 빼앗긴 땅을 되찾는 데 협조만 해준 꼴이 될 수도 있다. 야심만만한 진흥왕이 이 정도로 만족했을 리가 만무하다. 어쩌면 백제와 동맹할 처음부터 기회가 되면 한강 하류까지 병합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라가 백제와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툰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가 반격할 게 뻔하고 어쩌면 어렵게 차지한 한강 상류 지역까지 다시 고구려에 빼앗길지도 모른다. 진흥왕도 충분히 이런 예상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와 동맹을 깨뜨린 데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13년(552) 5월조에는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해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백제]와 임나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때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고 오히려 백제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동맹군으로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던 신라가 거꾸로 고구려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인데, 혹 백제 측에서 신라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신라의 배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고구려와의 연화설을 내세운 게 아닐까 생각해 봄직도 하다.

그런데 553년 무렵 백제는 어렵사리 되찾은 한강 유역을 신라에 내주게 되는데, 이때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 등이 벌어진 흔적은 사료상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백제가 스스로 물러난 듯한 인상인데, 이는 백제군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이유로는 '일본서기' 기사대로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으로 상정하는 게 가장 타당해 보인다. 백제는 고구려·신라 양군의 협공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은밀히 밀약을 체결해 후방의 위협을 던 신라는 백제와 한판 승부를 꾀하였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고구려는 백제군에 대해 반격을 꾀하여 서해안 일대 루트를 이용해 지금의 안성천 부근에 있는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다. 백제군은 군대를 되돌려 깊숙이 쳐들어온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백제군이 후퇴한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는 손쉽게 차지하였다. '일본서기' 흠명기 13년(552)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해 백제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 그리고 555년 10월에 진흥왕은 북한산 일대를 순수하였다. 이제 한강 유역이 완전히 신라에 편입되었음을 자신의 순행으로 널리 과시한 것이다.

552년 무렵 고구려와 신라의 갑작스러운 밀약은 명분보다 실리를 택하는 진흥왕의 전략적 변신을 보여주지만, 고구려의 탁월한 대응력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백제와 신라군의 공격으로 삽시간에 한강 유역을 잃어버리게 된 고구려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북진을 저지해야 하지만, 아직 내부 정치적 혼란으로 군사적인 대응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때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동맹을 깨뜨려 신라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신라의 한강 유역 영유를 인정했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은 배신이란 오명은 썼지만 재빠르게 고구려가 내민 협상 카드를 받아들여 밀약을 맺고 한반도 중부지대를 차지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매일경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탑본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 맺은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이나 외교적 타협은 언제까지 지속되었을까? 그 뒤에도 한 차례 그 흔적이 보이고 있다. 바로 진흥왕 순수비에서 찾을 수 있다. 정복 군주로서 진흥왕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는 그의 발자취에 따라 남겨진 순수비다. 현재 진흥왕순수비는 4개가 발견되었다. 이른바 창녕비(경남 창녕군 창녕읍), 북한산비(서울 구기동 북한산 비봉), 황초령비(함남 함흥군 하기면 황초령), 마운령비(함남 이원군 동면 마운령)가 그것이다. 그중 창녕비를 제외한 마운령비·황초령비·북한산비는 같은 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하나의 세트처럼 공통된 성격을 갖는다.

매일경제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탑본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는 그 첫머리에 '태창(泰昌) 원년(元年) 세차(歲次) 무자(戊子) 8월 21일 계미(癸未)'라는 기록이 있는데, 진흥왕 재위 기간 중 무자년(戊子年)은 568년이다. 이해 8월 21일에 진흥왕이 현지에 와서 순수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북한산비는 건립 시기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비문에 등장하는 인물과 관등(官等) 등이 마운령비·황초령비의 그것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어 같은 해에 진흥왕이 북한산 지역에 순수하여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진흥왕은 재위 29년(568)에 한강 하류 방면과 동해안 방면의 세 지역을 잇따라 순수하여 3개의 순수비를 세웠다. 이런 중요한 진흥왕의 순수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삼국사기'에는 상반되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568년에 북한산주(지금 서울 아차산 일대)를 폐지하고 남천주(지금 경기도 이천)를 설치하고, 비열홀주(지금 함남 안변)를 폐하고 달홀주(지금 강원도 고성)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州)'란 영토 최전방에 설치된 군사 전진기지에 해당한다. 그래서 주의 장관도 군주(軍主)였다.

진흥왕은 그 이전 555년에 북한산에 순행하고, 557년에 북한산주를 설치하였으며, 556년에 비열홀주를 설치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최전선의 전진기지인 '주'를 유지하다가 오히려 순수비가 세워진 해인 568년에 후방으로 한걸음씩 후퇴한 셈이다. 즉 한강 방면은 서울 강북에서 이천으로, 동북 방면은 안변에서 고성으로 물러선 것이다.

진흥왕순수비에 나타난 대로 568년에 진흥왕이 서울과 동해안 지역 두 방면을 순수하여 순수비를 세웠다고 한다면, 그 방면의 군사 전진 기지를 더욱 전진시키는 조치가 이루어져야 마땅해 보이는데, '삼국사기'에는 오히려 이를 후퇴시키는 조치를 취했다고 기록하니, 어떻게 된 것일까? 진흥왕순수비 기사는 당대 기록이니 부정할 수는 없고, 그러면 '삼국사기'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사실 그 답을 풀 일부 단서가 진흥왕순수비에 담겨 있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해를 요청하는 사신이 서로 통하여 오도다"라고 기록한 구절이 눈길을 끈다. 이 구절에서 '이웃나라'는 고구려를 가리킨다. 즉 고구려가 신라에 화평을 제의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을 굳이 순수비문에 적어 넣은 것은 양국 사이에 무언가 협상이 이루어지고, 이를 신라의 입장에서 자랑스레 비문에 새겨 넣은 것이다. 양국 사이에 주고받은 협상은 무엇일까? 그 협상의 신라 쪽 조처가 바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최전방 전진 기지인 북한산주와 비열홀주를 후방으로 후퇴한 상황이라고 충분히 추정해볼 수 있다. 아마 고구려 쪽으로서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포기하는 조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양국은 상호불가침 협정을 맺은 셈인데, 한창 기세등등한 진흥왕은 왜 고구려와 이런 협상을 했을까? 그 배경은 역시 백제의 위협이다.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았는데, 다시 백제를 배신하고 공격하여 한강 하류 유역까지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한 성왕마저 관산성 전투에서 포로로 잡아 살해함으로써 백제와 돌이킬 수 없는 원수 사이가 되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의 전쟁에 힘을 쏟아야 할 형편이었기에 고구려와 더 이상 전선을 확장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에 고구려의 협상 제의를 받아들여, 고구려와의 최전방 전진 기지를 후퇴하였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당시 고구려가 처한 국제정세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어쨌거나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신라의 진출을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에서 타협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신라와 백제의 동맹을 균열시켜 깨뜨렸고 백제와 신라가 계속 충돌하면서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남부 전선이 안정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외교 전략이란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은 없다. 버릴 건 버리면서, 서로 최선의 이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6세기 중반 한강 유역 일대에서 고구려가 구사한 외교 전략의 결과로 나타난 삼국의 정세는 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