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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우리말 톺아보기]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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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양화대교’라는 노래의 가사다. 이 노랫말을 통해 ‘행복하자’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표현이 거슬렸다. 물론 지금은 노래에 익숙한 만큼 ‘행복하자’란 표현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처음엔 왜 ‘행복하자’가 거슬렸을까? 내가 ‘행복하다’의 품사가 형용사임을 특별히 의식했기 때문일 거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인 형용사는 그 속성상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이나 청유문의 서술어로 쓰기 어렵다. ‘오늘부터 예쁘자/예뻐라’나 ‘오늘부터 높자/높아라’란 표현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를 근거로 글쓰기 선생님은 형용사를 명령이나 청유문의 서술어로 쓰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해라/건강하자.”나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해라/침착하자.”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기만 하다. 형용사를 명령이나 청유문의 서술어로 쓰지 않는다는 걸 문법적 원칙으로 삼는다면, ‘건강하게 지내라/지내자’나 ‘침착하게 대처해라/대처하자’로 표현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표현에까지 문법의 원칙을 일률적으로 적용할 순 없다. 이쯤 되면 이러한 표현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를 찾는 게 합리적이다.

사람들은 ‘건강하다’나 ‘침착하다’를 ‘그러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의식적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당당하자, 솔직하자, 정직하자’가 자연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이는 분명 ‘예쁘다’나 ‘높다’의 쓰임과는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형용사가 명령과 청유문의 서술어로 쓰일 수 있느냐는 결국 그 형용사의 의미에 대한 언어적 인식이 어떠한가에 달린 것이다. ‘행복하자’가 자연스러운 우리들에게 ‘행복’은 ‘애써 도달해야 할 어떤 경지’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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