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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철의 스틸라이프] "잠시 제 꽃 좀 맡아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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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하는 청초한 꽃 ‘클레마티스’
기나긴 여행 떠날 때 ‘반려식물' 어디에 맡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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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성왕릉 석상들에 바친 클레마티스(2016년).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김현승 시인의 시 ‘플라타너스’ 첫 행을 읊조릴 때, 나는 언제나 같은 운율을 갖곤 했다. 좋아서 자주 떠올렸으니, 행여 플라타너스와 비슷한 발음을 지닌 뭔가가 있다면 말을 바꾸어 중얼거리기도 했다. 아틀란티스, 세르반테스, 하운드투스, 와까리마스… 시인의 계절은 초가을이려니 하는 마음.

종로 꽃시장에서 클레마티스 화분을 두 개 산 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란 얼마나 복되도록 어여쁜지. 5월 종로 꽃시장에서 클레마티스 화분을 두 개 산 날, 양손에 그걸 들고 집으로 걸어오며 나는 온통 다른 생각에 젖어 있었다.

클레마티스. 처음 이 꽃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를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알던 이름이 아니니까 언젠가 무슨 계기로 들었을 텐데 영 모르겠다. 그러니 그냥 내게로 왔다고 해둔다. 정류장의 시내버스처럼. 그런데 보자마자 나는 이 꽃의 여러가지를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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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가’라는 제목을 고려 중인 클레마티스 사진(2015년).

넝쿨이라서 온통 ‘지멋대로’ 자란다는 뉘앙스, 한 잎 한 잎 또렷이 퍼지는 얇은 꽃잎(상처가 잘 나는), 흰색과 분홍색과 쪽빛에 가까운 보라색으로부터 유년기 신작로의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한 일, 클레마티스라는 발음. 토종으로는 으아리가 내내 같은 종인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으아리는 ‘토종답게’ 잔잔하니 소박하다. (개중엔 상록 으아리라는 놈도 있는데, 맵시가 참 청초하다.)

나는 마음먹고 예쁜 걸 곁에 두려는 순간마다 클레마티스를 사야지 한다. 쇼팽 발라드 1번이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2악장을 들으며 한껏 고양된 순간을 맞고자 한다. 즙이 흐르는 고기를 무자비한 포크로 찍어 먹는 것도 좋겠군. 멀쩡한 전깃불 다 끄고 촛대에 초를 몇 개씩이나 꽂고 켜는 쓸데없이 화려한 행복 따위에 웃는 밤.

한번은 클레마티스 화분을 사서 경주에 갔다. 5월의 경주는 아름다웠다. 들로 산으로 실제 거리보다 멀거나 가깝거나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펼쳐지듯 거기에 있었다. 나는 버릇처럼 남산 옥룡암에 들렀다가 괘릉리 원성왕릉 앞으로 갔다. 그리고 클레마티스 몇 가지를 꺾어 그곳의 석상들에 바쳤다.

이왕이면 이 꽃은 맡기는 대신 선물로

신라는 어떤 나라인가, 두고두고 스스로 질문하는데, 원성왕릉을 지키고 서있는 무인상과 문인상 앞에서 그 질문은 유난히 꿈틀거린다. 칼이며 복식이며 무인은 페르시아 사람의 모습이고, 눈매며 장식이며 문인은 중앙아시아 어디쯤의 사람을 닮았다. 그런가 하면 잇몸까지 만개해서는 웃고 있는 사자상도 있다. 거기에 꽃을 바치며 나는 묻는다.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웨어 아 유 프럼?” 천 년이거나 이천 년이거나, 그렇게도 오래 전에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리고 신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혹시 ‘헌화가’를 아시는지요? 저는 그 향가 속에 나오는 꽃이 클레마티스일 거라고 멋대로 상상해버리는 2018년의 여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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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으아리와 마가목 꽃꽂이(2016년). 올해 벚꽃이 질 때쯤, 골드문트(Goldmund)의 새 앨범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피아노라는 타악기 혹은 타악기로서의 피아노. 골드문트의 음악에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고, 해머가 현을 때리는 순간의 소리가 먼지처럼 들어 있는데, 이번 앨범 제목은 ‘Occasus’라고 했다. 새삼 그 단어를 찾아보고 뜻이 따로 있음을 알았지만, 나는 덜컥 그것이 ‘코카서스’로부터 온 발음이라고 생각했다. 조지아라는 나라가 있지. 수도는 트빌리시. 거기는 지금 몇 시일까. 창가에서 클레마티스 화분이 볕을 쪼이고 있다. 가만, 저것들을 어디에 맡겨야 할 텐데. 트빌리시 출장 1주일이 어여쁜 클레마티스에게 죽음의 카운트다운이어서는 안 될 일. 집 앞 이화분식 아주머니라면 맡아주시지 않을까. 철마다 가게 앞으로 꽃들을 알차게도 피워내는 분이니 이 클레마티스를 보면 좋아하지 않으실까. 나는 늦은 점심으로 순두부를 먹으려 방을 나선다. 클레마티스 화분은 맡기는 게 아니라 선물로 아주머니께 드려야겠다. 기억이라도 남긴다는 듯이 나는 꽃 하나를 꺾어 병에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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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철은 한 잡지의 에디터로 15년을 보내다 한여름에 그만두고는 이런저런 일을 한다. 요새는 ‘DAZED KORE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HOUSE VISION SEOUL’의 에디터, ‘샌프란시스코마켓’의 라이터(이상 수입 순), 사진가 등으로 불리며 글쓰고, 사진 찍고, 인터뷰하고, 기획하고, 진행하고 그런다. 또한 해마다 초겨울이면 엄마가 짠 참기름과 들기름을 파는 기름장수가 되기도 한다. ‘여기와 거기’, ‘좋아서 웃었다’ 두 권의 책을 냈다. 몇 번인가 전시를 열었고, 서울과 논산을 오가며 산다.

[장우철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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