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남북 대화·충돌의 상징 판문점…65년째 닫힌 반대편 문 열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 고스란히 간직한 ‘판문점’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판문점(板門店)을 한자 그대로 풀면 ‘판자문이 달린 가게’다. 남북 경계선에 걸터앉은 실제 판문점은 ‘문’이자 ‘벽’이다. 남과 북이 각각 문을 열고 들어와 마주 앉지만, 상대편 문은 닫힌 벽과 다름없다. 본래 뜻과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이곳은 지난 65년간 한반도의 비극을 압축하는 상징적 장소가 됐다. 숱한 충돌과 대화의 장이기도 했다. 그만큼 27일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이뤄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1년 만에 열리는 남북 정상의 대화가 반대편 문을 마저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판문점 주소는 2개다. 남측 행정구역으로는 경기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측 것으로는 개성특급시 판문군이다. 주소는 있지만 남북 모두 행정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특수지역이다. 원래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던 이곳의 이름은 널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신하던 선조가 강물에 막히자, 농부들이 널문(대문)으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한 뒤부터 널문리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인근 사천강에 널판 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국전쟁은 마을 이름을 바꿨다. 판문점이라는 한자식 지명 자체가 비극의 산물이다.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과 공산군은 1951년 10월25일부터 널문리 주막 앞 콩밭에서 휴전협상을 했다. 첫 휴전협상이 열린 개성 내봉장에서 장소를 옮긴 것이다. ‘널문리 주막’을 중국 측이 찾기 쉽게 한자로 표기한 게 판문점이다. 이때부터 초가집 몇 채와 주막을 겸한 작은 가게가 있던 농촌 마을에 임시 천막들이 세워졌다. 휴전협상이 765차례 이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를 보면, 총을 멘 군인들이 지키는 회담장 옆 밭에서 농부들은 보리와 감자를 수확했다.

현재의 판문점은 1953년 7월27일 최종 정전협정이 체결된 곳은 아니다. 확정된 군사분계선(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을 가로지르는 곳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을 두기 위해, 그해 10월 원래보다 남쪽으로 더 내려온 현 위치로 옮겨왔다. 위치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판문점으로 불렀다. 판문점은 이미 단순한 지명이 아닌, 상징적 기호가 돼 있었다.

비극과 희망을 품은 건물들이 차례차례 들어섰다. 군사분계선상에는 남북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푸른색 건물 3개 동이 놓였다. ‘임시(Temporary)’의 영문 첫 글자를 따 T1, T2, T3로 불렀다. 임시 건물은 65년째 그곳에 서 있다. 경계선을 중심으로 남북 대칭으로 자유의집(남측)과 판문각(북측)이 세워졌다. 이번 정상회담 개최 장소인 남측 평화의집과 북측 통일각은 각각 1989년과 1985년 남북회담장 용도로 준공됐다.

원래 JSA는 남북 공동경비구역으로, 이 안에선 양측 경비병들이 선을 넘어 오갈 수 있었다.

하지만 1976년 8월18일 북한군의 도끼만행 사건 이후 판문점에도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됐다. 그날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 도끼 등으로 살해당했다. 이틀 뒤, 미 제2보병사단 공병과 한국군 제1공수특전단이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미루나무를 아예 잘라냈다. 당시 국군 제1공수특전단이었던 문재인 대통령도 후방에서 폴 버니언 작전에 참여했다. 전면전까지 비화할 분위기였지만 2차 충돌은 없었다.

그해 9월 군사분계선상에 높이 5㎝, 폭 50㎝의 야트막한 돌들이 놓였다. 돌을 넘는 것은 금지됐다. 포로 교환에 이용하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폐쇄된 것도 이때다. 포로들이 이 길을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 군사분계선 남측에 있는 다리다.

이 다리를 이용할 수 없게 되면서 북한은 3일 만에 ‘72시간 다리’를 놓았다. 지난해 말 판문점을 넘어 귀순한 북한군 오모씨가 차량을 타고 질주한 곳이 72시간 다리다. 1976년 이후로도 크고 작은 충돌은 이어졌다. 1984년 구소련 학생인 마투조크가 판문점을 통해 귀순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한국군 1명과 북한군 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충돌의 최전선이었지만, 대화의 통로이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철조망 없이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공간이라는 특수성과 상징성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군사정전위원회뿐 아니라 남북 간 회담의 무대로 본격 활용됐다. 1971년 8월 남북 적십자 접촉을 시작으로 남북 연락사무소가 설치되고 그해 9월 자유의집과 판문각 사이 직통전화 회선이 열렸다. 이른바 ‘판문점 핫라인’이다. 이런 접촉은 1972년 남북 당국 간 최초 조약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오는 밑거름이 됐다. 남북 간 당국회담·적십자회담·군사회담 등 다양한 회담들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총 655번의 남북회담 중 360번은 판문점이 무대였다.

남북 인사들이 오갈 때도 판문점을 거쳐가는 경우가 많았다. 1989년엔 방북했던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1차 북핵 사태가 절정에 이르던 1994년 6월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가 돌아오며 전환점을 만들었고, 4년 뒤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통일소’ 500마리를 이끌고 이 길을 거쳐갔다.

눈물과 기쁨의 순간들이 판문점을 통로로 교차했다. 1985년엔 남북 이산가족들이 판문점을 통과해 서울과 평양에서 처음으로 상봉했다. 이산가족들의 애달픈 편지도 판문점을 통해 오갔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현정화, 이분희 등) 우승 직후 북측이 먼저 1년 보관했던 우승컵이 남측에 넘겨진 장소도 이곳이다. 1993년엔 전향을 거부하고 장기수로 복역해온 이인모씨가 이곳을 통해 북으로 송환되며 42년 만에 가족과 해후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