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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4·3’이라는 아픈 단어…제주 평화 기행을 가다-11살 생존자가 여든이 넘어서야 꺼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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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현기영 <순이삼촌>) 정방폭포, 함덕 해변, 성산일출봉과 천지연폭포. 7년간 이어진 ‘4·3’으로 3만여 명이 희생된 제주의 유명 관광지는 거의 모두 4·3 유적지다. 전쟁, 재해, 학살이 일어난 장소를 다니며 성찰하고 반성하는 ‘다크투어리즘’(역사교훈여행) 기행으로 4·3 70주년을 맞은 제주를 찾았다. ‘속솜하라(조용히 해라)’는 말에 둘러싸여 산 70년의 세월, 제주에서 만난 당시 11살 생존자 홍춘호 할머니는 “이제야 가슴 속 말을 꺼낼 수 있어 좋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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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보고 누운 백비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고 적혀 있다. ‘백비’란 어떤 연유로 이름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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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메멘토…제주 4·3평화공원

2007~2008년 발굴 당시 388구의 유해가 발굴된 제주공항에서 10년 만에 4·3 유해 발굴을 재개한다는 뉴스 기사가 떴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리는 순간, “제주에선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하겠다”던 <화산도> 김석범 선생과 비행기가 뜰 때 양 발을 살짝 들어올린다는 제주 출신 김수열 시인의 말이 기억났다. 신이 많은 제주는 영등할망이 섬에 들어오는 시기인 음력 2월1일~15일에 땅이 한 번 뒤집힌다. 눈보라, 비바람이 부는 등 날씨가 궂어 빨래도 안하고 농사도 안 짓는 그 시기에 태어나면 팔자가 궂단다. 영등할망이 와 있는 음력 2월7일, 마침 생일을 맞은 필자가 제주 땅을 밟는 마음은 그래서 왠지 범상치 않았다.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도 영등할망이 뒤흔든 흔적, 눈 웅덩이가 여기저기 보였다. 두 살배기 딸을 품에 안고 눈밭에서 발견된 변병생 모녀의 조각상 위로 까마귀떼가 군무를 펼친다. 유독 모녀의 머리 위를 반복 선회하던 새를 보고 수근거리던 일행은 위령탑과 행방불명인 표석을 지나 각명비로 나아간다. 같은 성씨의 한 집안 식구들 이름이 즐비하게 쓰여 있다. 4세, 8세, 12세. 아이부터 어른까지 도민의 9분의 1이 숨진 4·3으로 4만 호에 가까운 집이 불타고 3만여 명이 희생됐다. 총, 수장, 죽창, 방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명이 살상됐고, 초토화 작전에 대한 무장대의 복수도 이어졌다. 자료와 증언을 통해 조사한 죽음의 유형은 원통형의 하얀 벽에 설치미술, 조소 등의 부조물로 표현돼 있다. 바로 고길천 작가의 <죽음의 섬>이다. 4·3 당시 숨었던 동굴을 형상화한 터널로 진입한다. 역사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의미일까. 하늘을 향해 누운 백비를 지나 다랑쉬 특별전시관으로 들어선다. 11명의 민간인이 질식사한 동굴 현장을 절개해 드러내놓았다. ‘초토화와 대학살’, ‘해방과 후유증’ 등 여러 섹션을 지나면 어두운 터널에서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에 4·3 희생자들의 사진이 붙어있다. 4·3평화공원은 처절한 학살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인권 기념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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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없는 박물관, 모슬포 섯알오름

지난해 제주비엔날레가 열리기도 했던 알뜨르는 일제시대에 군수품 수송을 위한 비행장이었다. ‘마을 아래에 있는 너른 뜰’이라는 뜻의 알뜨르는 옥수수와 갈대밭 너머로 붉은 석양을 자랑하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드문드문 마치 이글루처럼 늘어선 비행기 격납고는 구조가 어찌나 견고한지 아무리 강력한 중장비로도 부술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재는 전쟁의 광기를 기억하는 근대 문화 유산으로 지정해두고 있다. 비행장의 동남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움푹 파인 땅 위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4·3이 진정될 무렵, 6·25 전쟁이 터지자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잡아넣은 이들을 총살해 묻은 곳이다. 일제강점기 화약창고였던 곳을 미군이 폭파시켜 움푹 패인 지형이 희생자들의 학살터가 된 것이다. 6년이 지난 1956년에야 뼈를 수습해 묘지를 만들지만 오랜 세월 탓에 분간되지 않은 132명의 뼈를 한데 묻은 후 ‘백 명의 할아버지에게서 난 하나의 자손’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묘비를 세운다. 송악산 일제 동굴진지와 고사포 진지, 섯알오름 동굴진지를 지나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지하 벙커에 이르는 길은 올레길 10코스와 거의 겹쳐 있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전쟁의 잔재를 4·3의 비극과 함께 목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섯알오름 4·3 유적지다. 추모비 앞에는 고무신과 돈이 놓여 있다. 학살이 있고 나서 얼마 동안은 모슬포의 개들까지도 전부 미쳐서 돌아다녔다는 섯알오름은 등록문화재만도 8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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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명이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된 만벵디 묘역, 추모비 앞에 누군가 놓아둔 고무신과 동백꽃 배지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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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하며 곡을 했다가 잡혀가 고문 당했다는 ‘아이고 사건’으로 유명한 조천읍 북촌리, 동굴 속으로 불을 피워 11명의 민간인을 질식시킨 다랑쉬마을도 섯알오름과 같은 4.3 유적지다. 군주둔지였던 월정리의 아름다운 해안은 피로 물들었고, 이틀 동안 400여 명이 사망해 4·3 최대 학살터가 된 북촌리는 남자들이 모두 죽어 ‘무남촌’으로 불릴 정도였다. 돌을 묶어 수장시키는가 하면, 어린 아이 다리를 잡고 돌에 메쳐 죽이고, 자식의 목을 어머니 손에 들려 서귀포 시내를 돌게 하는가 하면, 며느리가 시아버지 총살 장면을 보고 만세를 부르라고 시키는 등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할 만행이 4·3 기간 수많은 마을에서 행해졌다. 제주 출신 한겨레신문 허호준 기자는 오랜 세월 수차례 국내외를 오가며 4·3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관련 논문을 써온 장본인이다. “현장에서 증언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밝힌 허 기자는 “3대 독자 아들을 살리려고 온갖 고문 다 받고 총살된 어머니, 야쿠자가 되거나 자신이 학살하려 했던 피해자와 결혼한 서청 단원도 있었다”고 밝혔다. “한번은 희생된 어머니 관련 증언을 하다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귀신 들린 증상을 보이는 분도 계셨어요. 마당에 소주를 뿌리며 “어머님도 편안해질 거다”라고 말씀드렸지요.”

▶4월3일, 4시 3분, 403명의 퍼포먼스…그리고 <순이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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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일 오후, 4시 3분, 403명의 퍼포먼스가 이뤄진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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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 몹이 끝난 4·3 광화문 분향소에는 영정사진 대신 신건우 작가의 <제주를 품다>가 놓여 있다. 한라산을 서귀포 쪽에서 바라보면 백록담의 형태가 마치 설문대 할망이 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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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3일 오후 4시 3분. 분주한 도심의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70년 전의 희생자들이 누워 있다. 자동차와 행인들의 소음 속에서 자그마하게 종 소리가 들리자 마치 무덤에서 일어난 듯 화석처럼 빛 바랜 몸을 일으킨다. 이윽고 중앙광장에 모인 403명의 희생자들은 옷을 찢으며 여기저기서 자신의 잃어버린 이름을 외친다. “내 이름은, OOO~!” 이름 없이 죽은 70년 전 4·3의 영령들이 2018년 서울 광화문 거리에 출몰, 자신의 이름을 찾고 슬픔의 역사를 이겨낸다는 내용의 플래시몹엔 배우, 마임이스트, 무용수 외에 일반인들도 300명 이상 참여했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아티스트들은 엄혹한 시절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아픔을 책과 연극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영화와 영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지난 4월6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에서 개최된 ‘4·3을 말한다’ 대담에는 4·3 당시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이 학살된 사건을 배경으로 다룬 <순이삼촌>의 현기영 작가가 참여했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당한 북촌마을은 후손이 끊긴 집이 많았다. <순이삼촌>은 학살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한 순이삼촌이 주인공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사건”이라 4·3을 표현한 현기영 작가는 군부독재시절, <순이삼촌>을 발표했다가 고문을 당한 이후에도 4·3을 꾸준히 알려온 장본인이다. 한편 함께 대담에 참여한 김석범 작가는 소설 <까마귀의 죽음>, <화산도> 등을 일본에서 발표, 제주 4·3을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알린 장본인이다. 그는 “입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4·3은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이었다고 역설했다. 4·3에 대해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던 1980년대를 지나, 2013년 4·3은 영화 <지슬>로 사람들의 뇌리에 처음 크게 각인됐다.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제주 출신 오멸 감독의 영화로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한다’는 미군정의 소개령 때문에 큰넓궤동굴에서 두 달간 집단 은신 생활을 한 동광리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당시 11세였던 홍춘호 할머니는 그 큰넓궤동굴에서 40일을 살았다.

제주 4·3 생존자 홍춘호(82) “오래 살고 보니 이런 날도 온다.”

영화 '지슬' 소재 큰넓궤 동굴에서 40일간 피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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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고 해서 무등이왓(무동이왓)으로 불린 마을. 4·3은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고 진취적이었던 이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로 만들었다. “동굴에서 40일을 살다가 들켜서 한라산으로 도망갔는데, 눈 발자국 보고 쫓아온 토벌대가 임산부까지 죽였어.” 4·3 이후 남동생 셋을 잃고 하나 남은 남동생을 시집살이 하며 키워낸 홍춘호 할머니는 눈 위 발자국을 지워서 살아남았다. 현재 소 500두를 키우는 부농이 된 동생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표정이 밝았던 홍 할머니는 “묻어둔 얘기도 하고, 이제야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첫 학살 순간이 기억나시나요?

총소리를 처음 들으니 첨엔 도망도 안 갔어. 사람을 줄로 묶고 총으로 쏘니까 그때 도망갔지. “여기 있는 건 다 빨갱이야”라며 순경 아버지까지 다 죽였어. 11명이 불려 나갔는데 그중에 한 명은 좀 덜 얻어맞아서 도망쳤고. 이곳(동광리 483번지)이 최초학살터야. 나머지 사람들도 잠복학살터에서 많이 죽고. 소개작전이 시작되면서 마을이 잿더미가 됐어. 겨울이 되니 부모님, 사촌언니, 2살, 5살, 8살 남동생이랑 큰넓궤 동굴로 피신을 했는데, 동생들은 동굴 나온 뒤 영양실조로 다 죽었어.

▷왜 잠복학살터인가요?

시신을 거두러 온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죽였으니까. 죽창으로 다 찔러 죽이기 힘드니까 눕혀놓고 짚단 위에 불을 질렀지. 굴러다니며 도망가면 죽창으로 찌르고. 그때 엉덩이 찔린 남자애는 살았어. 그 애 어미는 돼지 변소(우리)에 숨었지. 맷돌을 갈 때마다 “나는 돗집에 숨어 살아낫수다. ‘살려줍서, 살려줍서’ 허는 애기 놔두고 나만 혼자 살앗수다” 노래를 부르며 울다가 나중에 신을 받았고. 우리가 그때 미군정이니 남로당이니 뭘 알아. 중산간 사람이라고 다 죽인걸. 어머니가 불길한 꿈을 꿔서, 그날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갔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동굴에서 배고픔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우리는 늦게 들어와서 동굴 제일 안쪽까지 들어가야 했지. 동굴이 협소해서 아버지가 왔다 갔다 먹을 거리를 날랐는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배도 안고팠어. 억새를 빨대처럼 꽂아서 고인 물을 먹고, 밀을 맷돌에 갈아 뜨거운 물에 넣어 먹었지. 대소변은 그냥 3층 동굴에서 1층 동굴로 싸는 거야. 먹는 게 없으니 나오는 것도 없었지. 한번이라도 밤하늘을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나오니까 40일이 지나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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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 육거리 120여 호가 전소돼 사라진 무등이왓 마을의 최초 학살터(아래)와 당시 지도(위). 토벌대는 주민을 상대로 연설을 한 후 강신학(57), 강군봉(51) 등 주민 10여 명을 ‘강귀봉 댁 우영밧’에서 집단 총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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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에서처럼 동굴이 발각된 건가요?

토벌대에 잡힌 사람이 동굴로 안내했는데 입구가 좁은 데다 고추에 불을 붙인 연기 때문에 못 들어왔어. 아침에 다시 오려고 돌로 막아놓은 입구를 열고 마을 청년들이 구해줬어. 길에서 개죽음 당하느니 동굴에서 죽자는 사람도 있고,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우리도 나왔어. 산밧구석 사람들은 빌레못굴로 가다가 발각되서 정방폭포에서 죽창으로 죽었고, 우리는 맨 뒷사람이 발자국을 지우면서 도망가서 살았어. 영화? 비슷한 거지, 진실은 아냐. 우리가 겪은 고통의 10분의 1도 안 된다고 화를 낸 사람도 많지. 그걸론 턱도 없다.

▷언제 산에서 내려오신 건가요?

봄에 ‘손 들고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삐라를 아버지가 받아왔지. 막대에 흰 천을 꽂고 내려갔더니 토벌대가 실적 올렸다고 좋아하대. 수용소 비슷한 지서에서 며칠 있다가 통통배에 타라길래 수장시키려는 줄 알았어. 중산간마을에만 살다 보니 바닷물을 보고 겁이 난 거지. ‘오늘은 우리 다 살았다’라고 하면서 울며 갔는데 단추공장으로 보내더라. 소라껍질과 전복껍데기로 단추 만드는 곳이었는데 거기 가니 비로소 배가 고파오대. 부모님은 수용소로 가고 12살에 순경 집에 아기업개(식모)로 들어갔는데 착한 사람을 만났어. 엄마한테 갖다 주라고 옷과 음식도 싸주고.

▷할머니 마을을 초토화시킨 것도, 도와준 것도 순경(경찰)이네요. 기분이 어떠셨어요?

살았구나 하는 마음 밖에 없었지. 4·3 때 나쁜 사람도 많았지만 의인도 있었어. 대학살을 막아낸 대대장, 파출소 소장도 있었고. 단순히 해안으로 가지 않고 중산간 지역 사람이라고 폭도로 몰았는데. 누구한테 손가락질만 해도 총살 당하는 시국이었어.

▷4·3이 끝났는데 마을로는 안 돌아간 건가요?

소개 안 했다고 죽었으니까 집 주변으로는 아예 얼씬도 못했지. 70년이 지났어도 죽창으로 찔렸던 골목길은 못 지나다니는 사람 많아. 7년이나 이어진 그 생활을 한번 더 하라고 하면 아마 그냥 죽겠다고 할 걸. 4·3이 끝나도 ‘석방쟁이’라고 집도 잘 안 빌려줬어. 외양간 한 귀퉁이를 빌려 소똥, 말똥 말려서 불을 때고 솥단지 빌려서 밥을 해먹었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마을 공터에 담을 쌓고 집을 만들었어. 바닥에 보릿대를 깔고 지붕엔 억새를 덮었는데 겨울에 눈이 얼굴에 막 떨어져도 ‘우리 집 생기니까 좋지?’하고 웃었어. 아버지가 4대 독자였는데 아들 셋을 4·3 이후에 다 잃었으니 어머니는 부끄럽다고 낮엔 바깥 출입도 안 하셨어. 9년 만에 동생을 낳고 40일 만에 복막염으로 돌아가셨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으신가요?

4·3 이후에도 동광리 출신이라고 해변사람들에게 ‘빨갱이다’ ‘폭도다’ 라며 천대 받은 게 서러웠어. 오래 사니까 맘속에 있는 말도 하고 자식들한테도 안 하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좋네. 가족들한테 나 방송 나가고 책에도 나왔으니까 보라고 했어(웃음). 이제야 살 것 같다.

4·3이 뭐우꽈? 한눈에 보는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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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정의된 4·3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2000년 제정된 제주 4·3 특별법 제2조) 1948년 4월3일에 봉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4·3 사건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단초가 된 것은 그 전해인 1947년 3월1일 28주년 삼일절 기념대회였다. 경찰 기마대의 말발굽에 어린 아이가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지만 경찰이 사과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뜨자, 군중은 돌팔매질을 하고 이를 봉기로 착각한 군경이 발포한 것. 젖먹이 아이를 안고 있던 20대 주부와 10대 소년을 비롯해 6명의 시민이 숨졌지만 경찰은 정당 방위였다며 강경대응을 한다. 친일 경찰의 재등용, 미군정의 과한 수탈에 화나 있던 민심은 제주 도민 95%가 참여한 민관 합동 총파업으로 대응하고 이에 제주를 좌익본거지로 파악한 미군정은 통행금지령을 내린다. 1948년 남한 단독선거에 반발해 투표가 무산되자 2500여 명이 수감되고 4월3일 일제99식 총 30여 정과 죽창을 든 무장대가 봉기한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 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며 투쟁을 시작한다. 이후 회담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될 뻔한 4·3은 우익의 협상 파기와 이승만의 초토화 작전으로 3만여 명이 희생된다.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1만5000여 명, 그중 어린이와 노인도 12%에 이른다. 2000년에 4·3 사건 특별법이 제정된 후 2003년에 4·3 정부 공식 보고서가 채택되었고, 2006년에 대통령이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를 한 뒤, 2014년에는 국가 추념일로 제정됐다.

소개령도 없이 시작된 동광리 초토화 작전

영화 <지슬>에도 등장한 4·3 유적지 큰넓궤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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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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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15일 새벽, 제주섬의 북서부지역 중산간마을인 안덕면 동광리에 토벌대 군인들이 들이닥쳐,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을 학살하고, 사흘 뒤 마을을 불태워버린다. 그렇게 동광리 주변의 무동이왓, 산밧마을 주민들까지 120여 명이 산으로 들어가 ‘크고 넓은 동굴’이라는 뜻의 ‘큰넓궤’ 동굴에서 보초 서기, 식량 준비, 물길어오기 등 역할을 나눈 ‘큰넓궤 공동체’로 50일간 생활한다. 1949년 굴이 발각된 후 한라산으로 숨었지만 대부분 잡혀서 40여 명이 정방폭포 쪽에서 학살된다. <지슬> 촬영 당시 엎드린 채 기어가야 하는 좁은 입구를 지나 ‘칼바위’라 불리는 내부를 지날 때는 전 스태프의 외투가 모두 찢어졌다. 말린 고추를 태워 토벌대를 쫓는 장면에서는 실제 고추를 태우며 눈물 범벅이 됐고, 아무도 건드린 적이 없는 카메라가 혼자 서서히 줌 인을 하고 있던 ‘돌문화공원’ 촬영 신은 모두들 ‘귀신컷’이라 불렀다.

▶“바당시랑(바다 때문에) 살았쥬”

해마다 4월이 되면 제주 도민은 ‘4·3앓이’를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많았던 4·3. 가옥 등 재물 피해 외에도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이,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와 레드 콤플렉스, 공동체 파괴 등 정신적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빨갱이’로 손가락질 당하면서도 물질을 해서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키워냈던 4·3 생존자들은 그야말로 ‘바다시랑 살았다(바다 때문에 살았다)’. 정부는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했지만 홍 할머니처럼 4·3의 기억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마지막 생애 주기를 맞은 지금, 제주 도민들은 70주년이라고 반짝 보인 관심이 동백꽃처럼 떨어질까 걱정하고 있다. 3만 명 각각의 희생의 이야기를 쉽게 놓아주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부표처럼 떠밀린 제주도가 여전히 강한 사람들이 지켜가고 있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섬이기 때문이다. 제주 평화기행 현장에서 불현듯 3.11 대지진에 대해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 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던 영화배우 기타노 다케시가 생각났다. “2만 가지 죽음에 각각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4·3의 슬픔은 눈물로도 필설로도 다 할 수 없다. 그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나온다고 말한다.”-현기영 <목마른 신들> 中

70주년을 맞아 유튜브 영상, 전시, CF로 만나는 제주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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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의 증언을 영상에 담아 제주 4·3 의 참상을 생생하게 담아낸 <묻지도 듣지도 않았던 제주의 4월> 영상은 유튜브에서 7만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다큐에 직접 출연한 4·3 생존자 고완순 할머니는 “시신이 이리 자빠지고 저리 자빠져있는 옴팡밭에 얼어붙어있는 피가 햇빛이 비치면서 유리알처럼 반짝이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밝혔다. 19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지닌 10~20대 전문 동영상 플랫폼 쥐픽쳐스가 올린 ‘제주 4·3 사건 한방에 정리’ 편은 18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6월10일까지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 전이 열리며 낙원악기상가 ‘d/p’에서는 제주 4·3을 사진, 글, 영상 등으로 표한한 전시 ‘잠들지 않는 남도’ 전이 열린다. 그런가 하면 4·3 70주년을 홍보하는 CF도 전파를 타고 있다. 양윤호(<바람의 파이터> 드라마 <아이리스>), 한재림(<관상><더킹>), 오멸(<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 등 제주 출신 영화감독 3인이 만든 CF에는 배우 안성기, 작가 유시민 등이 출연했다.

[글 박찬은 기자 사진 박찬은,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참고 및 자료 제공 <제주 4·3바로알기><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3범국민위,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26호 (18.05.01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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