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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일사일언] 기억의 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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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진유정 카피라이터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점심을 먹었다. 점심 메뉴였던 동태내장탕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기억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10년 전 어머니를 하늘로 보낸 선배에게 어머니 음식 중 제일 생각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어떤 맛을 떠올렸길래 입가에 그런 미소가 번진 건지 순간 선배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그리고 남몰래 간직하고 있던 귀한 상자를 살며시 열듯 말했다. 추어탕. 어머니는 추어탕을 끓이실 때면 하루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하셨다고, 베보자기에 싸서 손으로 일일이 주무르며 뼈를 분리하고 미꾸라지 살을 곱게 내리셨다고 한다. 점심을 먹는 내내 선배의 마음엔 김이 서린 듯 보였다. 마치 보약 같았을 어머니의 추어탕, 그 뜨거운 김이.

선배의 추어탕 같은 소중한 기억들은 우리 몸 어디에 저장되어 있는 걸까. '참 괜찮은 죽음'이란 책에서 의사인 저자는 뇌수술을 위해 흡인기를 머릿속에 넣으며 생각한다. 온통 젤리 같은 물질로 차 있는 뇌 안에서 흡인기가 뇌 아닌 감성과 이성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는 것 같다고, 그러다 보면 기억이니 꿈이니 추억이니 하는 것들조차 다 젤리로 이뤄진 게 틀림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고. 정말 그런 것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그렇게 한순간에 불려 나오는 걸까.

몇 해 전부터 시골에 계시는 엄마의 레시피를 정리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기록한다고 그 맛을 똑같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대체 불가능한 맛이 있고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있으니까. 다만 레시피를 적으며 엄마와 보내는 다정한 시간들이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 엄마가 곁에 없는 날이 오더라도 엄마와 보낸 소중한 시간들을 불러낼 힌트를 더 많이 갖고 싶은지도.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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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메모장을 뒤져보니 엄마의 레시피가 있다. 참나물 무침과 우리 집에서는 '쏙세'라고 부르는 고들빼기 무침. 시장에 고들빼기가 나왔던데 무쳐봐야겠다. 엄마와 쏙세 무침에 쓱쓱 밥 비벼 먹던 어느 아침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진유정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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