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8 (목)

[노진호의 이나불] 툭 하면 시한부 타령 … 한국 드라마 불치병인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높아진 시청자 눈높이 못따라가

드라마 끊어지고 시청률도 하락

20년간 써먹은 장치 언제까지 …

존엄사 접목 ‘키스 …’는 새로워

중앙일보

뇌종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MBC 수목드라마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의 주인공 남현주. [사진 MBC]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말씀해주세요.” 19일 MBC 수목극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에서 여주인공 남현주(한혜진 분)는 주치의에게 이렇게 묻는다. 곧장 예상 가능한 대답이 등장한다. “수술하긴 늦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는 건 옳지 않아요. 늦었다는 건 내 판단이고.” 이렇게 뇌종양으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사실상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현주는 또 한 번 울컥한다. 그리고 외친다. “얼마나, 얼마나 남았죠?”

주인공 현주를 연기하는 한혜진, 극 중 그의 배우자를 연기하는 윤상현 등 10년 이상 된 배우들의 자연스런 연기는 이 드라마의 극적 전개를 설득력 있게 그려간다. 그런데도 아, 이 식상함은 어쩔 수가 없다. 한국 드라마에 쉽게 발견되는 고질병, 바로 ‘불치병’으로 인한 시한부 인생이란 설정 때문이다. 적지 않은 드라마, 특히 지상파의 드라마에선 사랑하는 연인이나 소중한 가족이 불치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게되는 전개가 곧잘 등장한다.

중앙일보

24일 종영한 SBS ‘키스 먼저 할까요?’. 극 중 손무한(감우성 분)은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사진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4일 종영한 SBS 월화극 ‘키스 먼저 할까요?’는 드라마 초반부터 헛헛한 중년들의 감성을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 큰 호평을 받았다. 헌데 지난달 12.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까지 올랐던 시청률은 최근 7%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시한부인 주인공 손무한(감우성 분)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극이 점점 더 신파조로 간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도 최근 극의 전개가 빨라지며 시청률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시한부나 불치병은 매우 극적인 소재다.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끝이 정해진 이를 향해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은 사랑,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사랑은 우리가 그렇게도 꿈꾸고 바라던 ‘순수한 사랑’, 혹은 지고지순한 사랑의 결정으로 비친다. 시한부 인생을 통해 절절한 사랑을 표현해 명작으로 꼽히는 드라마도 많다. ‘가을동화’(2000), ‘겨울연가’(2002), ‘네 멋대로 해라’(2002), ‘천국의 계단’(2003) 등. ‘편지’(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등의 영화도 빼놓을 수 없다.

중앙일보

지난달 종영한 KBS2 ‘황금빛 내 인생’에서 암으로 운명을 달리한 서태수. 이 드라마는 앞서 그가 상상암이란 설정까지 등장시켰다. [사진 K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미 20여 년 전에도 시한부나 불치병은 드라마 등에 단골로 활용돼온 소재다. 이를 새로운 시선 없이 로맨스의 장치로 활용하는 건 진부함을 안겨주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시청자를 무시하는 행위로 보이기도 한다. 시대 흐름에 따라 시청자의 의식도, 죽음과 질병에 대한 태도나 사회적 이슈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키스 먼저 할까요?’는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담고 있다. 무한은 스위스의 한 병원에 존엄사를 신청하고 마지막을 준비하려 한다. 이를 알게 된 순진은 무한을 병원에 입원시키려한다. 무한은 이에 따르면서도 “나한테는 어떻게 살까가 어떻게 죽을까”라면서 자신의 ‘존엄’에 대해 누차 얘기한다. 이는 그간 불치병 소재를 시청자 울리는 신파의 소재로만 활용했던 것과는 결이 다르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고통과 아픔이 내재된 불치병이란 소재는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소재라서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대신 “보편적 소재를 진부하게 답습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행위가 없다. 새로운 시각과 접근을 담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치병’ 만큼이나 한국 드라마의 고질병이었던 ‘기억상실’ 소재와 ‘신데렐라’ 내러티브는 시청자들 외면을 받고 이제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일부 판타지 멜로극이나 사극에서나 눈에 띈다. 지난해 중순 고달픈 청춘의 현실과 로맨스를 그려 큰 인기를 끌었던 KBS2 ‘쌈, 마이웨이’는 극 중 대사를 통해 이런 정서를 통렬히 드러냈다. “백마 태워 호강시켜주길 바라는 여자들이 세상에 널렸을 거 같은가 본데 그 신데렐라 기지배는 이젠 드라마에서도 안 먹혀요.” 아직까지도 명대사로 회자되는 여주인공 애라(김지원 분)의 말이다.

식상한 소재의 반복은 특히 지상파 방송에서 자주 등장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지상파는 드라마 소재나 형식을 무난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을 중심으로 폭넓은 시청층을 고려해야 하는 채널 특성, 수차례 결재라인을 거쳐야 하는 딱딱한 의사 결정 구조 등 이유는 여러 가지일 터.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모든 사정을 고려해도 지상파 드라마는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청자가 달라지고 있거니와 드라마의 영역에서 지상파는 더 이상 유료 채널의 ‘도전’을 막아내야 하는 1등의 위치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노진호의 이나불
누군가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모바일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카카오 플러스친구] [모바일웹]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