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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25만원에 '불륜 카톡' 복구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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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중순 한 40대 남성이 스마트폰을 들고 서울 서초동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이곳 대표 변호사가 대검 디지털포렌식(디지털 정보를 분석해 범죄 단서를 찾는 수사방법) 부서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전화기에서 삭제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복구해주세요.” 그는 “아내가 썼던 전화기지만 내 명의로 되어있어 법적 문제도 없을 것”이라며 “불륜 증거를 모조리 잡아내서 이혼 소장을 작성해 달라”고 했다.

최근 민·형사 사건에서 디지털 포렌식이 ‘스모킹건(결정적 단서)’을 캐는 핵심 기술로 떠오르면서 서초동 법조타운에도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소송관계인들이 변호사에게 스마트폰과 컴퓨터에서 삭제된 파일을 복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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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에 통화·문자·이메일·위치기록·사진·영상·금융결제내역 등 모든 정보가 낱낱이 기록되면서부터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서초동에선 디지털 포렌식을 전담 자문하는 로펌과 사설 데이터복구업체 수십 곳이 성업 중이다. 스마트폰이 처음 등장한 10년 전쯤부터 하나둘씩 생기더니 2~3년 사이 크게 늘었다. ‘서초동에 속기사무소만큼이나 데이터복구업체가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사설 데이터복구를 의뢰하는 사람 대다수는 ‘불륜’ 증거를 잡으려는 이들이다. 서울중앙지법 근처에서 데이터복구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카카오톡 복구 작업에만 25만원을 받는다”며 “의뢰인의 70~80%가 ‘배우자 외도 문제’로 온다”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연인이 바람을 쐬러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나들이철’이 복구업체 최대 성수기라고 한다.

법무법인 평강 최득신 변호사는 “개인정보 및 사생활 침해 문제 때문에 배우자 휴대전화를 복구해 달라는 의뢰인을 돌려보낸 적이 많다”며 “타인의 휴대전화 잠금장치를 풀어 내용을 살피거나, 탈취해 복구까지 하면 정보통신망법·개인정보보호법 등 형사 처벌 가능성이 있는데도 일부 업체가 탈법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이혼·채무 등 민사소송 관계자 다음으로 많은 유형이 기업 고객이다. 퇴직자가 반납한 회사 소유 노트북PC에서 영업기밀 유출 혐의를 잡아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검찰청 근처 데이터복구업체 대표 안모(30)씨는 “원래 사무실이 강남구 신사동에 있었는데 법조타운 수요가 많아 최근 서초동으로 이사왔다”며 “CCTV 영상부터 차량 네비게이션까지 다양한 복원 의뢰가 들어온다”고 했다.

형사 사건에서 ‘무죄’를 입증하려는 수사 대상자들도 복구업체 문을 두드린다. 특수부 검사 출신 변호사 B씨는 “지난달 초 안희정 전 충남지사 측이 ‘미투’ 폭로가 터진 직후 변호사들을 물색할 때 상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가 ‘결백하다면 하루빨리 휴대전화부터 복구하라’는 내용이었다”며 “실제로 안 전 지사가 ‘사설 복구’에 나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은 수사 대상자가 ‘증거 인멸’만 하는 게 아니라 ‘증거 복원’도 한다”고 했다.

최근 ‘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드루킹 김동원(49)씨 역시 텔레그램·시그널 같은 보안 메신저로 범죄를 모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범죄의 시작과 끝이 휴대전화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에 모바일 포렌식이 곧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열쇠로 통하고 있다.

하지만 소송관계인들이 사설 복구업체를 찾았다가 멀쩡한 증거를 못 쓰게 되는 경우도 많다. 디지털포렌식 권위자인 고려대 이상진 정보보호대학원장은 “업체 복원 과정에서 해시값(전자지문)이 바뀌어 법원에서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 원장은 “‘최순실 태블릿PC’ 역시 취득자가 포렌식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파일을 열람하는 바람에 디지털 증거로서는 오염이 됐다”며 “증거 채택을 원치 않는 이해당사자에게 자료의 진실성 논란을 제기할 빌미를 줬다”고 했다.

디지털 증거는 파일 수정과 삭제 등 위·변조가 쉬운 탓에 법원이 입증 요건을 까다롭게 요구한다. 그래서 분석 과정에서 훼손 흔적이 발견되면 증거로 쓰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디지털 기기에서 과거 흔적을 없애주는 ‘디지털 장의사’ 업체가 주목받았다. 이제는 ‘잊혀질 권리’ 뿐 아니라 디지털 증거를 살려내는 이른바 ‘복구할 권리’의 시대가 됐다.

[한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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