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데스크가 만난 사람]'홈런왕' 아닌 '자연인' 이승엽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스포츠서울

이승엽 KBO 홍보대사(이승엽야구장학재단 이사장)이 서울 서초구 이승엽야구장학재단 사무실에서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응하고있다. 2018.04.18.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박현진 체육부장] 그를 만날 때면 늘 안쓰러웠다. 항상 최고의 자리에 있었지만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한·일 통산 626홈런,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 467홈런, 시즌 최다 56홈런…. 홈런과 관련한 수많은 기록이 그의 손에서 쓰였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췄다.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일종의 경외심이 느껴진다. 이승엽(42)은 그렇게 ‘국민타자’가 됐다.

야구를 벗어나 살 수 없을 것처럼 야구에 매달렸던 이승엽은 지난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은 뒤 야구를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지난 8일에는 이승엽장학재단을 출범시켰고 자서전 ‘나. 36. 이승엽’을 펴냈다. 선수시절 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고 있다. 스스로 절제하는데 익숙했던 선수로서의 부담감을 훌훌 털어낸 해방감이 그의 표정을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만드는 듯했다. ‘선수’가 아닌 ‘자연인’ 이승엽을 만나 지금까지 와는 또다른 그의 이면을 들여다봤다.

- 은퇴 이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하는 팬들이 많다.
지난 8일에 이승엽장학재단 출범식을 가졌다. 사무실을 오픈했으니 매일 출근한다. 정해진 출근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출근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유니폼이 아닌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것에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는 적응이 됐다. 조금씩 야구를 떠난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낯선 자리에 참석할 일도 많고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야 하는 것이 아직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낯가림이 조금 있는 편인데 계속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성격도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생각보다 일정이 빠듯하다. 야구는 1년 동안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지만 지금은 딱히 정해진 것도 없는데 매일매일 일정을 소화하기 바쁘다. 가능하면 애들 등하교를 직접 시켜주려고 하는데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고 하다보면 하루가 다 간다. 그동안 아내가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스포츠서울

이승엽 KBO 홍보대사(이승엽야구장학재단 이사장)이 서울 서초구 이승엽야구장학재단 사무실에서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응하고있다. 2018.04.18.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은퇴 이후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 본인의 이름을 건 장학재단을 설립한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아이들이 올바른 모습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게 첫 번째이고 유일한 이유다. 나도 어린이 야구를 하면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에 이만수 감독님이 학교를 방문해서 함께 야구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대 최고의 선수와 함께 뛰는 것이 정말 꿈만 같았다. 나도 은퇴한 이후에 그런 추억을 아이들에게 많이 남겨주고 싶었다. 주변 환경 때문에 야구를 그만둔 친구, 선·후배들을 그동안 참 많이 봤다. 마음껏 도전해보지도 못하고 타의에 의해 꿈과 희망이 버려진다면 얼마나 후회가 되겠나.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 중 몇 명만이라도 그런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 내 야구의 뿌리가 대구에 있기 때문에 대구시청에서 재단 인가를 받았고 사무실도 대구(시민야구장 내)에 마련했다. 그렇지만 많은 일들을 서울에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서울에도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 이승엽장학재단은 향후 어떤 일을 하게 되나?
여름 쯤에는 야구교실을 열 예정이고 늦어도 내년에는 이름을 걸고 어린이야구대회도 개최해보려고 한다. 리틀야구팀과 초등학교 야구팀이 모두 참가하는 대회를 해보고 싶은데 각 연맹이 별도로 구성돼 있어서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 일차적으로 대구경북 지역팀들만으로 시작해 볼까 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초등학교 꿈나무들을 지원해 많은 프로선수를 배출하는 것이 목표다. 장학재단을 거쳐가는 선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프로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리와 인연을 맺은 친구들이 올바르게 성장해 사회를 떠받치는 인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부족하지만 어린이를 찾아가는 서비스나 시간을 가능한 많이 가지려고 한다. 장학금이나 용품도 지원할 예정이고 필요하다면 정신적인 부분이나 기술적인 면에서도 야구선배로서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재단을 통해 다른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다행히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신다. 그런 분들이 재단을 후원하기를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칭찬받고 싶다.

- 얼마전에는 자서전도 펴냈다. 책은 잘 팔리나?
얼마나 팔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나가는 편은 아닌 것 같다. 팔리고 안팔리고는 중요치 않지만 판매수익금을 모두 기증하기로 약속했으니 많이들 사보셨으면 좋겠다. 평생을 야구만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책을 쓰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틈나는대로 메모하고 자다가도 생각나는 부분이 있으면 벌떡 일어나서 글을 썼다. 출판사 분들과 회의를 하는데 익숙치 않은데 매번 한 시간 이상을 검토하고 수정에 수정을 하면서 다듬다보니 머리가 너무 아팠다. 워낙 많은 분들의 얘기가 들어있다보니 조심스러운 부분도 많았다. 혹시라도 섭섭함을 느끼지 않으셨으면 한다. 독자분들께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도 보태거나 빼지 않고 진솔하게 썼다. 23년의 프로생활을 끝내고 이렇게 이름을 건 책을 펴낸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다.

- 지도자 이승엽, 해설자 이승엽에 대한 얘기도 꾸준히 나온다.
재단 운영은 평생을 해야하는 일이고 지금부터 시작이다. 사람들에게 제대로 평가를 받으려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잘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엔가 매이는 직업을 선택하면 여기에 힘을 쏟을 수가 없다. 적어도 2~4년까지는 이 일에 매진해야 한다. 그렇게 기반을 다져놓으면 그 뒤로는 신경을 조금 덜 쓰더라도 굴러갈 것이고 그 때는 다른 직업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는 힘들다. 두 가지 일을 다 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실제로 해보니 정말 힘들더라. 4년쯤 뒤에는 지도자로 현장에 있을 수도 있고 양복을 입고 출근하게 될 수도 있다. 많은 길이 있지 않겠나. 그러나 그것은 모두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쌍방의 마음이 맞아서 물흐르듯이 이뤄져야 한다.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둘 생각이다. 다만 삼성에서 워낙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100% 진심을 다할 자신은 아직 없다. 일본에서 은퇴할 운명인줄 알았는데 복귀해서 또 6년을 더 뛰었다. 감사한 마음이 크다. 잊을 수가 없다. 그게 사람된 도리이고 솔직한 내 마음이다. 해설 제안은 꾸준히 있는데 아마 가끔 한 번씩은 하게 될 것 같다. 아시안게임때도 마이크를 잡지 않을까 싶다.

- 공교롭게도 은퇴 시점을 못박은 시점부터 삼성의 성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늘 상위권을 유지하던 삼성이 하위권을 전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무겁다. 2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프리에이전트(FA) 계약을 2년한 것은 은퇴를 예고한 것이었다. 1~2년 더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릴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후배들이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후배들이 설 자리가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을 것이다. 어지간하면 나를 2군으로 내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내 자리에 도전하려는 후배들이 의기소침했을 것 같다. 선택의 폭이 좁아지면서 1루수가 성장하지 못한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봤기 때문에 2년 정도 뒤에는 기반을 마련해서 올라오는 후배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내 책임도 크지만 김한수 감독께 죄송한 마음이 들고 후배들에게도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다. 한편으로는 지난 2년이 헛된 시간이었나 실망스럽기도 하다. 프로답게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 경쟁에 나이는 의미가 없다. 잘하는 선수가 출전하게 돼있다. 그런 치열함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다.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하는 순간 뒤처진다. 나태해지고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야 발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비난보다 격려가 더 필요하다.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고 미래를 보도록 하면 된다.
스포츠서울

이승엽 KBO 홍보대사(이승엽야구장학재단 이사장)이 서울 서초구 이승엽야구장학재단 사무실에서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 응하고있다. 2018.04.18.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대부분의 선수들은 부침을 겪고 한두 차례는 고비를 만난다. 스스로 돌이켰을 때 야구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나? 반대로 야구인생의 절정은 어느 순간이었을까?
최악은 일본 시절이다. 특히 2008년 부터 3년 동안은 정말 힘들었다. 경기장에서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는 부분이었는데 요미우리에서는 다른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았다. 다른 팀에는 미안하지만 요미우리는 비교대상이 없는 팀이다. 최고의 팀이지만 실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그렇게 냉정한 구단이 없다. 오해도 있었고 마치 초등학생 다루듯 대하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마음의 상처가 컸다. 따뜻한 말을 해주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제발 말을 하지만 말아줬으면 하고 바랐다. 야구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2군에 내려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심정을 몰랐는데 언젠가 후배들이 속내를 털어놓으면 그 때는 잘 받아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제일 기억에 남는 홈런을 꼽아달라는 얘기를 했는데 정말 한 개를 선택하지는 못하겠더라. 2002년 한국시리즈때 날린 홈런도 있고 아시아신기록을 세웠던 시즌 56호 홈런도 있다. 베이징올림픽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2002년 처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던 장면이다. 홈런을 치고 운 적이 많지 않은데 그 때 가장 많이 울었다. 한국시리즈에서 네 번 우승했고 일본시리즈에서도 두 번 우승했는데 우승하고 울었던 것은 2002년 뿐이다. 그만큼 첫 우승의 기억이 강렬했다. 그해 MVP도 받았고. 베이징올림픽 때도 홈런을 때린 뒤에 울었는데 그 때는 ‘울분의 눈물’
이었다면 2002년엔 그야말로 ‘기쁨의 눈물’이었다.

- ‘이승엽’하면 모두가 홈런을 떠올린다. 그러나 홈런 만큼이나 본인이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홈런 때문에 득점과 타점도 많았다고 봐야 하니 특별히 홈런 외에 잘했던 것 없는 것 같다. 무엇을 떠올려도 한 가지 이상 단점은 있는 것 같다. 남들은 플레이를 깨끗하게 했다고 얘기하는데 실제론 난투도 한 번 있지 않았나. 다른 분들께서 판단을 해주시지 않을까. 당연한 것이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뿌듯하게 생각한다. 홈런 기록도 곧 깨지지 않겠나. SK 최정이 가능성 있어 보인다. 40홈런 이상을 5년 더 기록하면 된다. 그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나. 기록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 자부심을 갖고는 있지만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은 없다. 야구를 잘해야겠다는 욕심은 강했는데 기록에 대한 욕심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 메이저리그에도 도전할 기회가 있었지만 일본을 선택했다. 후회스럽지는 않나. 만약 일본에 진출하지 않고 국내에 머물렀다면 그야말로 불멸의 홈런 기록을 남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건 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일이다. 한국에서 뛰었다면 마흔까지 야구하지도 못했을 것 같다. 일찌감치 은퇴하지 않았을까. 미국에 갔다면 더 일찍 그만뒀을 것 같기도 하다. 일본에서의 경험 덕분에 관리의 중요성을 알았다.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 등 좋은 투수들을 상대하면서 실패하기도 했지만 좋은 타격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큰 도움이 돼서 오래 야구를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느끼면서 경험한 것이다. 실패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실패했을 때 배우는 것이 더 많다. 어떤 분들은 일본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시는데 내가 생각했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는 항상 실패라고 얘기한다. 일본에서도 최고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컸다. 내게 실망했다. 돌이켜보면 많이 아쉽다. 더 잘할 수 있었다. 코칭스태프와 맞지 않아 의견차가 컸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 말하면 다 핑계가 된다. 예전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정말 행복하게 야구를 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몇 년은 그러지 못했는데 정말 야구장에 나가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지금같은 성격이었다면 일본에서 어려웠던 문제를 더 유연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때는 너무 막혀 있었고 혼자 고민했다. 그렇지만 실패를 통해 경험이 쌓였고 어른이 됐다. 힘들었지만 인생을 배웠고 더 단단해졌다. (한일통산 626개의 홈런을 때렸으니) 그래도 한국에 있었다면 그보다는 조금 더 많은 홈런을 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 20년이 넘도록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면서도 한결 같은 자세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됐다. 때로는 숨막힐 듯한 답답함도 느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했나.
원래 야구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특히 일본에서 돌아와서는 더 심해졌다. 일본에서 실패했지만 마무리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니폼을 벗기 전까지 정말 후회없이 해보고 싶은 것을 다해보고 싶었다. 일본에 가기 전에는 그런 성격까지는 아니었다. 일본에서 큰 실패를 통해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편해졌다. 책임감도 느끼고 후배들이나 구단, 코칭스태프의 시각을 느끼고 들어준다. 100% 수렴하지는 않지만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꼈고 그대로 하면서 후배들에게도 좋은 영향이 있겠구나 생각도 했다. 그게 자연스럽게 이뤄졌고 힘들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재미있게 생활했다. 야구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 야구에 전념하기 위해 참아야 했던 것도 많을 것 같다. 은퇴 이후에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나?
하고 싶은 건 다했다. 억지로 참은 적은 없다. 다만 조금 불편했던 부분은 있었다. 가끔 외식을 하러갔을 때 뜻하지 않게 시비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다. 혼자 있을 때면 괜찮은데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오해를 받기 딱 좋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너무 좋다. 선수가 아니니까 사람들을 대하기가 너무 편해졌다. 예전엔 삶을 100으로 보면 야구가 80을 차지했는데 지금은 관심이 많이 분산됐다. 골프가 한 40 정도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소질은 없는 것 같다. 거리는 좀 나는 편인데 다 옆으로 가는게 문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야구 말고는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 포스트 이승엽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넥센 박병호, SK 최정 등이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현실적으로 최다홈런(467개) 기록을 넘어서기는 어려워 보인다.개인적으로는 올시즌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KT 신인 강백호가 신기록에 도전할만한 유일한 재목이라는 생각이다. 혹시 강백호의 플레이를 본 적이 있는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잘치더라. 팔을 다 펴지 않은 상태에서도 밀어서 담장을 넘기더라. 감각이 아주 훌륭하다. 목표의식도 있고 바른 친구 같더라. 그렇지만 아직은 시작도 안했다고 봐도 된다. 적어도 15~20년은 더 활약해야할 선수다. 험한 프로의 세계, 맹수들 우글대는 정글에서 어떻게 해야 최고로 살아남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팀도 잘 관리해서 최고가 될 수 있는 선수로 만들어야 한다. 포스트 이승엽이라고 하니 좀 멋쩍지만 박병호와 최정은 당연하지 않나. 처음엔 삼성 후배인 구자욱을 응원했는데 요즘 허리 부상 때문에 주춤한 것 같다. 그렇지만 부상도 자기가 이겨내야할 몫이다. 자기 관리에 더 신경써야 할 것 같다. 넥센 김하성도 아주 좋더라. 롯데 신인 한동희도 크게 될 재목같다. 이제 갓 시작했으니 2~3년 경험을 쌓으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
jin@sportsseoul.com

◇ 이승엽
▲출생년월일=1976년 8월 18일
▲출생지=대구
▲출신학교=경북고-대구대-영남대 스포츠과학대학원
▲경력=삼성 라이온즈(1995~2003.12)
일본프로야구 지바롯데(2003.12~2006.1)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2006.1~2010.11)
제29회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2008)
일본프로야구 오릭스(2010.12~2011.10)
삼성 라이온즈(2011.12~2017.10)
한국야구위원회 홍보대사(2018.1~)
이승엽장학재단 이사장(2018.4~)

[기사제보 news@sportsseoul.com]
Copyright ⓒ 스포츠서울&sportsseoul.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