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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신채호 일대기 만들고 평양에서 도쿄에서 ‘뜻밖의’ 단재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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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⑮ ‘꿈하늘’ 단재 신채호 일대기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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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팔 작가와 고석만 연출은 1982년 8·15 특집극으로 만든 ‘단재 신채호 일대기-한’(2부작)으로 ‘83 ‘한국방송대상’(국무총리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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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어린 생도가 오른손에 한국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일본헌병이 검으로 그 손을 내리쳐 베어버리자 생도는 왼손으로 기를 집어들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일본병은 다시 그의 왼손을 절단하였다. 그는 여전히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헌병의 머리를 들이 받으면서 쓰러져 죽었다.”(<조선독립운동기> ‘국민’ 제1권 제4호)

1919년 정주 시장터에서의 3·1만세 운동을 보도한 이 기사는 세계만방에 퍼져나갔다. 단 네줄의 단신이었지만 베이징대학 학생구국회의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과 영향을 미쳤다. 베이징대학 문과학장이자 신문화운동의 최고 지도자 천두슈는 이 기사를 보고 울분에 넘쳐 밤새 통곡한 끝에 새벽녘 <조선독립운동지감상>(朝鮮獨立運動之感想)을 집필한다. “3·1운동은 세계혁명사상 신기원을 열었다”, “조선민족 활동의 광영스러움에 비추어 우리 중국민족의 자폐하고 부진함의 치욕이 더욱 두드러진다…보라! 이번 조선인의 활동을!”. 천두슈의 격문은 중국인들을 격동시켜 ‘5·4운동’을 촉발시킨다.

1982년 8·15특집극 ‘한-신채호 일대기’
작가 김기팔 한마디로 이정길 캐스팅
“어이~신파배우! 연기 좀 잘해!”
유행하던 장발까지 싹둑 자르고 ‘열연’

‘광개토대왕비’ 실물 크기 그대로 제작
서오릉 야외촬영 현장 이동작전 ‘장관’

그해 9월 일본피디협회 초청 도쿄 방문
30여명 ‘한’ 시사한 뒤 날카로운 질문

2005년 8월 남북합작 영화 협의차 방북
서울 왔던 김기남 노동당비서 ‘단재’ 관심
“인민대학습당 ‘단재 유고’ 같이 활용하자”


그 영향을 받아 인도에서도 비폭력 저항운동이 싹트며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한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훗날, 3·1운동의 감명을 잊지 않고 한국을 노래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등불의 하나이었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3·1운동의 영향은 인도지나반도와 필리핀과 아랍의 일부지역까지 퍼져 이 지역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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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단재 신채호 일대기’ 제작을 맡은 김기팔(왼쪽) 작가와 고석만(오른쪽) 연출은 단재가 자란 충북 청원의 고향 마을과 사당 등을 직접 답사하는 등 최대한 고증을 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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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 이 땅의 대표적 지식인 ‘단재 신채호’. 언론인이자 사학자, 독립운동가로 한평생 꼿꼿하게 살다간 단재의 삶은, 우리 근대사의 먹구름 터널을 무섭게 관통하여 그 기개를 만방에 드높였다. ‘단재 신채호’의 드라마화! 1982년 대한민국에서, 왜? 단재이고, 왜? 고대사인가.

사학자 단재는 말한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우리의 민족사관을 수립하고, 한국근대사학의 기초가 된 단재의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상고사> 그리고 어린 벗들을 위한 동화 <용과 용의 대격전>은 <꿈하늘>과 함께 단재의 대표적 저서이고 그의 기본철학이다. 노예로 살고자 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지배할 수 있지만,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더 많은 서민들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단재는 정확하게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문화방송>(MBC)은 1982년 ‘8·15’ 특집으로 ‘단재 신채호의 일대기’를 김기팔 극본·고석만 연출의 <한>(恨)(90분짜리·2부작)이란 제목으로 방송하였다. 이 작품은 1983년 ‘제10회 한국방송대상’(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드라마는 단재의 마지막, 뤼순감옥의 비장한 죽음에서 시작해 일대기를 편년체로 담백하게 그려나갔다.

‘1880년 11월7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신광식과 밀양박씨 사이 차남으로 출생. 1898년(19살) 성균관 입학. 백암 박은식의 진보적 유학에 감화됨. 1905년(26살) 성균관 박사. 장지연의 초청으로 국한문혼용 <황성신문> 논설위원에 위촉, ‘시일야방성대곡’ 을사늑약 비판 논설로 신문 폐간. 영국인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치외법권을 활용해 주필로서 필봉. 1907년(28살) 안창호와 비밀결사인 신민회 취지문 작성.’

1910년 오산학교에 들린 단재를 보고 교사였던 춘원 이광수는 훗날 잡지 <조광>에 이렇게 적고 있다. “주필이나 되는 단재는 풍채가 초라한 샌님이나 이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붉은색 위아래 내의를 입고, 세수할 때 고개를 뻣뻣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지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 누가 핀잔을 주려하면 ‘그러면 어때요’라고 하였다. 남의 말을 듣고 소신을 고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얘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주인공 단재를 누가 연기할 것인가? 정답을 못 찾고 있을 때, 탤런트실 현관에 당대 톱스타 이정길이 지나갔다. 김기팔 작가가 갑자기 “어이! 신파배우!” 부르더니 화들짝 놀라 쳐다보는 이정길에게 “연기 좀 잘해!”. 그가 겸연쩍어 하며 자리를 피한 직후 작가는 내게 말했다. “내일 말고 모레쯤 섭외해봐.” 내일이 아닌 모레 만났다. 8·15 특집극, 캐릭터부터 연출 방향, 스케줄까지…극례를 갖춰 섭외하자 그는 한 순간 고심하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곤 맹렬하게 작품에 몰입했다. 주인공 출연중이던 일일연속극의 촬영 일정도 적극 바꾸고, 단재 분장에 맞춰 장발을 과감하게 싹둑 잘라 모두들 놀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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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역을 맡은 탤런트 이정길은 1970~80년대 ‘최고의 미남 스타’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도맡아 했다. 1980년무렵 한 잡지에 실린 남성 양복 패션 화보, 왼쪽부터 이정길, 김세윤, 노주현, 오지명.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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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29살)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과 금모으기 앞장. 독려의 글을 쓰고, 대구까지 내려가 계몽 연설. 윤치호·안창호·최남선과 청년학우회 발기해 실천적 계몽운동 추진. ‘역사연구가 곧 민족독립운동’이란 자각으로 민족주체사관 정립.’ 이무렵 단재는 스스로 금연을 결행하는데, 이전까지 단재의 담배 피우는 장면이 필수였고, 이정길 자신도 소문난 골초였던 까닭에 돌연한 ‘극중 금연’에 힘들어했다.

‘1910년(31살) 중국 망명과 청도회의 개최, 토지 개혁, 무관학교 설립, 교관 양성, 전문기술자 확보 결의. 1913년(34살) 청소년 대상 국사교육과 <조선사> 집필. 만주 일대와 고구려·발해의 유적 답사.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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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채 신채호 일대기'에서 <문화방송> 미술부는 아파트 3층 높이인 광개토대왕비를 실물 크기대로 제작했고, 촬영팀은 고양시 서오릉에서 최대한 실감나는 현장감을 살리느라 밤새 대책회의를 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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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의 광개토대왕릉비는 서기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선친(국강상 광개토 경평안 호태왕)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국내 최대의 비석이다. 고석만과 제작진은 1910년대 단재가 답사했을 때의 위용을 재현하기 위해 애썼다. 중국은 1982년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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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단재는 중국 지린성 지안에서 ‘광개토대왕비’를 만난다. 방송사 미술부 홍순창 디자이너가 ‘욕심’을 냈다. 광개토대왕비를 실물 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높이 6미터에 폭 2미터, 야외 촬영을 위해 들고 나가려니 세트실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회사에 보고없이 문을 부쉈다. 미술부는 그날 밤으로 깜쪽같이 수리하기로 하고…. 트레일러형 대형트럭에 싣고 시내를 관통하여 촬영지인 고양시 서오릉까지 이동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쟁이들은 한다면 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현장이었다. 서오릉 농장 넓은 풀밭 언덕 위에 광개토대왕비를 세워놓고 카메라를 대보니 위용은커녕 초라한 바위덩이 하나에 불과했다. 온갖 앵글을 다 동원해도 기대치엔 어림없다. 결국 그날 촬영을 접고 회사로 돌아와 모든 전문가를 동원해 대책을 숙의했다. 우리는 그때 많은 걸 터득했다. 야외에서 조각품과 자연 경관의 관계, 공간감과 시간감, 나아가 역사의 무게감까지 배웠다. 다음날 온갖 장치를 동원해 겨우 촬영을 마쳤지만, 단재의 실증적 감동엔 얼마나 접근했을까 의문이다.

‘1916년(37살) 중편소설 <꿈하늘> 집필. 한국민족이 당면한 현실적 역사적 과제와 독립운동의 길을 상징적으로 극화한 작품. 1928년 <용과 용의 대격전>과 함께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의 의지를 표명한 명작.’ 이즈음부터 단재는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에 나서는데, 제작진은 영상기법을 총동원해 그 정신을 그렸다.

‘1919년(40살) 3·1운동 발발.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피선. 대한독립청년단 조직. 1919년 4월 10일 임정 수립을 위한 29인 모임 참석.’ 이때 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추대하자, 단재는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반도 위임통치 청원서 제출한 사실을 들어 반대하고 퇴장한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이승만은 임정 초대 대통령에서 탄핵 당하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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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베이징 망명 시절 단재가 의열단의 요청으로 작성해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은 무장독립투쟁의 정당성을 천명한 역사적 명문으로 평가받는다. 유행하던 장발을 짧게 자르고 단재로 변신해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는 이정길의 열연이 돋보이는 장면.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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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41살) 베이징 망명중 유학생 박자혜(엄유신)와 결혼. 1923년(44살)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 작성해 발표.’ 이정길의 열연이 ‘깊고 긴 동굴에서 퍼지는 큰울음처럼, 보는 이를 격동시키는 장면이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일본을 살벌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뒤이어 비장한 행동지침이 하달된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원들이 휴대한 필수품의 하나였으며,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 등지에 널리 뿌려졌다. 이 선언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당국은 큰 전율과 공포에 사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상하이국민대표회의 참가, 창조파 가입, 상하이임정 해체 주장, 투쟁사관의 범위와 방법 천명.’ 이즈음 칩거에 들어간 단재는 최초로 역사방법론을 피력하며 ‘조선문화사’와 ‘조선상고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을 경고한다.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와도 공자의 조선이 된다. 주의도 마찬가지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1930년(51살) 5월 8일 무정부주의동방연맹 ‘국제위채(위조화폐) 사건’으로 체포, 10년형 선고받고 뤼순감옥 이송. 1936년(57살) 2월 21일 뤼순감옥에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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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단재 신채호는 비밀 결사 조직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위조화폐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다. ‘죄수 번호 411번 신채호’ 49살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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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 수감된 단재 신채호(이정길)는 35년 뇌일혈로 쓰러지지만 병보석조차 거부하고 이듬해 끝내 순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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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 나는 일본피디협회로부터 초청받아 2박3일 일정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공식 일정은 첫날 피디협회장 자택 만찬부터다. 협회장은 드라마피디이고 그 부인은 다큐피디였다. 통역은 약간 부족하지만 정수웅 선배가 맡아 주었다. 그날 모인 일본 피디 30여명이 한국말을 웬만큼 알아듣는 듯 했다. 몇몇은 한국 잡지 <창작과 비평> 최신판의 일본어 번역본을 들고 있다. 본격 토론에 들어갔다. 비디오 시사다. 놀랍게도 한달 전 방영한 내 작품 <단재 신채호 일대기-한>이다.

‘제1부’ 시사를 마치고 토론하는데 첫 질문이 놀랍다. “드라마 시작과 함께 묵음으로 진행된다. 한국말은 한마디도 없이 일본말만 간헐적으로 들리더니, 무려 29분 만에 처음으로 한국말이 나온다. 무슨 상징성이 있는가? 일제 압박시대를 표현한 것인가?”

그렇다. 어두운 뤼순감옥. 부인 박자혜가 면회를 왔다. 단재의 거동이 불가능하여 특별 감방면회가 허가된 것이다. 을씨년스런 복도를 지나고 또 지나 감방 앞, 처참한 남편의 모습을 본 부인의 비명같은 숨소리에 일본간수가 ‘곡소리 금지’를 주의시킨다. 아무말 못한 채 쳐다만 보다가 설음에 겨워 울음이 터지면 또 제지 당하고…또 제지 당하고…짧은 면회가 끝나 가족들이 쫓기듯 나가고, 단재는 홀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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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 연출이 1982년 ‘단재 신채호 일대기-한’에서 뤼순감옥의 단재를 부인과 아들이 임종 직전 특별면회하는 장면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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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가 1910년 압록강을 건널 때 읊은 시 ‘한나라 생각’이 생각난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베면/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 내려 오리니/ 한주먹 덥썩 그 피를 쥐어/ 한나라 땅에 골고루 뿌리리/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2005년 평양에서 ‘단재’를 다시 만나게 된다. 남북합작을 의논하기 위해 김영남을 비롯해 북쪽 고위관리들을 만나고 당시 서열 17위로 알려진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구체적인 사업에 대해 논의하다가 우연히 ‘단재 토론’을 하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랄만큼 진지하고 명쾌한 토론이었다. 그는 잘 알려진 북쪽의 석학으로 단재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는 “남쪽에서 단재에 대해 이정도로 박식할 줄 몰랐다. 뜻밖이다. 다음에 만나 더욱 깊게 얘기하자”면서 북한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된 ‘단재 유고’를 같이 보고 활용하고 싶다고 했다. ‘꿈하늘’에 오르는 듯한 감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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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말 문화방송 티브이제작 본부장 시절 고석만은 남북합작 영화 ‘광개토대왕’ 제작을 의논하기 위해 방문한 평양에서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만났을 때 ‘단재 토론’을 했다. 김기남은 앞서 그해 ‘8·15 민족대축전’ 북측 대표단장으로 서울을 방문해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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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는 사라지고, 독재의 야만성만 남은 방송 현실을 개탄하며, 단재의 ‘영웅론’을 통해 ‘청년정신’을 끌어내고 싶었다. 단재의 상고사는 곧 세계사다. 이제 세계사를 쓰자!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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