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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무연으로 떠난 영혼들은 납골당에 와서야 인연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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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기획연재

고스트 스토리 ⑤ 무연이 인연

시간에 파묻히기 전에 내 목소리를 꺼내 달라


한겨레

인천광역시의료원을 거쳐 연고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인천가족공원(부평구) 무연고 납골당의 1300여개 유골함 틈에 끼어 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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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연고 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인천가족공원(금마총)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된다. 2001~2017년 인천광역시의료원을 거친 사망자들(195명)의 유골도 문패 없는 지하방으로 들어가 10년(최장) 동안 ‘찾아와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가족 없이 죽은 한국인과, 동정 없이 죽은 외국인과, 북송되지 못한 북한인이 평소 문 잠긴 이 방에서 만나 비로소 인연을 얻는다.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 두 번 죽는다. 살았을 때부터 성대가 제거된 유령들이 산 자들에게 던지는 소리 없는 고함을 전한다.


나는 혼자 죽어 이 방에 모여 있다.

이 방.

인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마지막 종착지. ‘연고 없음’만 확인하고 떠난 자들이 빽빽하게 쌓인 ‘혼들의 퇴적지’.

죽은 뒤에야 맺어진 인연

나(▶1회 ‘죽음이 하는 말’·2011년 8월 사망 당시 60살·남)는 봉안번호 5-B1-036**.

‘형님들 똘마니’와 건설 현장 잡부로 전국(20여년 동안 30여개 주소지)을 떠다니다 죽은 나는 아무에게도 ‘인수’되지 않아 사망 18일 만에 이 방에 도착했다. 의사로부터 위암 선고를 받았을 때 “까짓 죽으면 그뿐”이란 말을 유언처럼 뱉은 뒤 ‘직장’(直葬·안치실에서 화장장으로 바로 이동)됐다. 가로 20×세로 20×높이 20㎝ 나무상자에 담긴 나는 인천가족공원 무연고 납골당의 1300여개 유골함(2008~2018년 사망자) 틈에 끼어 있다. 단 한 차례 반전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네 가난은 네 탓’이란 시선을 온몸에 화살처럼 꽂은 혼들이 방안에 수북했다. 가난하게 살았던 나만 가난하게 죽은 나를 겨냥해 ‘네 탓’을 쏘지 않았다.

나(2011년 7월 사망 당시 70살·남)는 봉안번호 5-B1-035**.

‘036** 나’의 유골함 왼쪽 상단 꼭짓점과 오른쪽 하단 꼭짓점을 맞댄 상자에 나는 있다. ‘그까짓 죽음’보다 37일 먼저 죽어 이 방에 왔다. 나는 동네를 뱅글뱅글 돌아야 찾을 수 있는 막다른 골목의 맨 끝 집(남구 주안동)에서 폐암으로 죽었다. 뱅글뱅글 돌아도 출구를 찾기 힘든 생사의 미로에서 나는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나(2011년 6월 사망 당시 59살·남)는 봉안번호 5-B1-035**.

‘끝집 나’로부터 위로 세 번째 상자에 바스러져 있다. 그보다 16일 먼저 죽은 나는 13일 먼저 이 방에 입주해 3번 빠른 숫자를 번호로 받았다. 지갑과 통장 2개, 수첩, 의료급여증, 작은 쪽지 하나가 유품으로 구청에 전달됐다. 내가 주소를 올린 지하 빈방에선 오래 쌓인 먼지가 짙은 안개처럼 날아올랐다. 교회로 사용됐던 방(기초수급 신청 과정에서 교회의 동의 아래 주소지 등록)은 몇 해 전부터 텅 빈 채로 나를 잊었다. 교회가 방을 뺀 뒤부터 나의 흔적도 먼지에 묻혔다. 수북한 먼지를 빗자루로 쓸고, 먼지에 묻은 나를 걸레로 닦아내며, 건물주는 자기 소유의 방에 대고 말(지난 2월21일)하곤 했다.

“여기가 어디 사람 살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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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가족공원 금마총 분향소(부평구)에 올려진 꽃들과, 꼭지를 따둔 캔커피와, 불을 붙인 담배들이 납골당 안의 혼들을 위로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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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을 때 서로를 몰랐던 나와 나는 죽어서야 만났다. ‘값싼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해 ‘병든 네팔 노숙인’으로 죽은 나(▶3회 ‘부르혼의 혼’·2011년 당시 40살·남)는 대만 화교로 죽은 나의 유골 위에 올려졌다. “나도 노숙인”이라며 형이 주검을 데려가지 않은 ‘대만인 나’(3회 등장인물·2011년 당시 51살·남)는 ‘네팔인 나’보다 17일 뒤 유령이 됐다. 나와 나는 다른 날 죽었으나, 같은 날(2011년 12월28일) 입관됐다. 같은 화장장(부평구)으로 보내져, 차례(예약번호 1번·2번)로 재가 됐다. 한꺼번에 이 방에 들어왔고, 아래(대만인)·위(네팔인)로 뼈상자를 붙였다.

유족들이 금마총 분향소에 올려둔 꽃들이 봄날(지난 3월27일)에 화사했다. 꼭지를 따둔 캔커피와 불을 붙인 담배들이 혼들을 위로했다. 내겐 꽃과 커피와 담배를 들고 찾아와줄 누군가가 없었다. 이 도시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다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죽음을 맞은 나는 모두 이 방에 몰아넣어졌다.

170㎝의 키에 39㎏(중증 폐결핵)으로 죽은 뒤 누나와 남동생으로부터 ‘인수 포기’된 나(1회 등장인물·2015년 당시 43살·남)는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쓰러진 ‘화교 노숙인 나’(3회 등장인물·2015년 당시 58살·남)와 나란히 배치됐다. ‘화교 노숙인 나’의 옆줄 맨 아래 상자엔 교동대교(강화군 교동면) 13번 교각에서 북한 민간인 사체(정부합동조사팀 결론)로 건져졌으나 통일부가 북한 송환을 거부한 내(▶4회 ‘주민번호 111111-1111111의 운명’·2015년 8월 화장)가 있다. 가족 없이 죽은 한국인과, 동정 없이 죽은 외국인과, 북송되지 못한 북한인이 이 방에서 만나 뼈를 맞댔다. 이 도시에 깔린 그늘과, 가난의 지구적 이주와, 분단을 넘어온 죽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잃고 ‘무연고’란 이름 아래 밀가루 반죽처럼 뭉쳐졌다.

나는 이 방에 갇혀 있다.

나를 넣은 상자는 금마총 안에서도 가족 있는 자들의 유골함과 분리·안치됐다. 나는 유령이 된 뒤에도 찾아올 사람 있는 유령들과 구별당했다. 추모객 없는 나는 봉안당 지하의 별도 방에 ‘보관’(사망 뒤 10년)돼 있다. 납골함도, 안치대도, 가족과 지인의 사진도 한 장 없이, 검은 매직펜으로 이름과 사망연도를 적은 값싼 상자에 담겨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버려진 혼들’을 안에 두고 문은 밖에서 걸어 잠겼다. 뒤늦게 나타난 가족이 나를 인수하러 올 때만 그 문은 드물게 열렸다. 문패조차 없어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방’에 내가 가득하다는 사실은 몰라야 할 비밀처럼 말해지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죽어간 이야기도 잠긴 문안에서 꽁꽁 봉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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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하나를 통과해야 다음 방에 이를 수 있는 ‘다다미식 쪽방’(중구 송월동)에서 두 명의 남자가 7년을 사이에 두고 살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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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말아야 할 비밀처럼

내 이름은 임한수(가명).

나(2009년 사망 당시 44살 추정·남)는 한 고등학교(남구 도화동)에서 죽어 발견됐다. 추운 겨울(12월) 아침 나는 얼음 낀 본관 베란다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등교하는 학생들의 청량한 목소리를 들었다. 학교 교감이 나의 죽음과 주검을 경찰에 알렸다. 사체 이동 흔적과 타살 혐의는 확인되지 않았다. 나를 안치한 의료원에서 그해 초 보름 동안 진료를 받은 사실을 경찰이 파악했다. ‘매일 술만 먹고 밥을 걸러 쇠약해진 몸(폐렴)으로 병원에 왔다’고 의료진은 진술했다. 술 취해 얼음 위로 넘어진 뒤 영하의 날씨에 동사한 것으로 내 죽음은 짐작됐다. 경찰은 나의 인적 사항을 “노숙자풍”이라고 보고했다.

나는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나는 1965년생으로 추정됐다. 6살 때 ‘버려진 아이’로 신고됐다. 나는 무적자(無籍者)였다. 연고의 뿌리인 성과 본(本)이 없었다. 대한민국 ‘공식 국민’이 되려면 나는 반드시 누군가의 후손(주민등록을 위해선 성·본이 필수)이어야 했다. 7살 되던 해 법원은 “성을 ‘임’으로 본을 ‘풍천’으로 창설”을 허가했다. 그때부터 나는 ‘풍천 임씨’로 살았으나 풍천 임씨 중 나를 가족으로 여긴 사람은 없었다.

임씨로 불린 38년 동안 나는 인천에서만 19곳의 주소지를 옮겨 다녔다. 짧게는 두 달 만에 새 거처를 찾아 떠나야 했다. 내 마지막 주소지(동구 송림동)는 사망 장소에서 직선으로 600m 떨어진 골목에 있었다. 그 거리에 집을 두고 학교에서 얼어 죽은 이유는 수사되지 않았다. 추정에서 시작한 내 삶은 추정(사인)으로 끝났다. 오직 가난과, 질병과, 정주하지 못한 시간만 추정되지 않고 선명했다.

살아있을 땐 서로 몰랐던 사람들
같은 쪽방·뒷골목·영구임대아파트
같은 노숙인 시설·요양원서 죽어
같은 무연고 납골당 봉안 뒤에야
생전 갖지 못했던 인연을 얻었다

가족 있는 망자들과 분리 안치돼
1300여개 나무상자에 끼인 혼들
성대 없는 유령 195명의 목소리
“무연고여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는 조건이어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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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하나 남기지 못하고 화장된 혼들이 무연고 납골당 안에서 빽빽하게 쌓인 채 잊히고 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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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과 동일 골목 40m 거리에 내(2009년 사망 당시 48살·남)가 있었다. ㄷ자 구조의 복도를 따라 방이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여인숙에서 나는 고단한 몸을 말았다. 내가 유령이 되고 열 달 뒤 여인숙 오른쪽 네 번째 집 남자(임한수)가 학교에서 죽어 유령이 됐다. 동사한 자와 상부위장관 출혈로 죽은 자가 도로에서 한참 물러난 뒷골목에서 이웃했다는 사실은 유령이 된 뒤에야 알았다.

연고 없는 자들이 오직 죽음으로 연결됐다.

나(2006년 당시 56살·남)와 나(2013년 당시 72살·남)는 7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쪽방에서 살다 죽었다.

“노크 세 번.”

방문 손잡이 위에 하얀 수정액으로 쓴 글자를 읽은 뒤 문을 열면 다시 문이 있었다. 다시 문을 열면 방이 나왔고, 다시 방을 통과해야, 다음 방으로 갈 수 있었다. 일렬로 이어진 첫 방과 중간 방을 관통해야만 끝 방에 닿았다. 방인데 통로였고, 복도인데 방이었다. 한뼘 방마다 부려진 얼굴을 대면한 뒤에야 자기 방에 이르는 ‘다다미식 쪽방’(중구 송월동)에서 서로를 본 적 없는 나와 내가 세월을 건너 동거했다.

똑똑똑.

“….”

이젠 문짝이 떨어지고 벽이 뜯겨나간 그 방에서 나는 아무리 노크해도 대답할 수 없는 유령으로 방치돼 있다.

무연만이 내겐 인연이었다.

나(2008년 당시 79살·여)와 나(2009년 당시 75살·여)는 같은 영구임대아파트(남동구 만수동) 같은 단지에서 11개월을 사이에 두고 ‘영구 빈곤’에 묻혀 죽었다. 생기 잃은 연안부두(중구 항동) 여관방에서 유령이 된 나(2003년 당시 55살·남)와 나(2013년 당시 61살·남)와 나(2013년 당시 83살·남)는 죽어서도 바다를 떠나지 못한 채 맴돌다 서로를 알아봤다. 사람들이 떠난 철거촌(부평구 십정동 재개발구역)에서 삶까지 철거된 나(▶2회 ‘죽음의 지리학’·2006년 당시 59살·남)와 나(2010년 당시 85살·남)와 나(2009년 당시 50살·남)는 이사 갈 곳도 없이 부서진 집을 지킨다.

나(2007년 당시 44살·남)와 나(2007년 당시 57살·남)는 같은 노숙인 시설(서구 심곡동)에서 생활하다 7개월 차이로 죽었다. 5명의 나는 같은 노인전문요양센터(남구 주안동)에서 차례로 유령이 됐고, 민간 병원들이 거부한 수많은 나는 인천의료원(지역 유일 공공의료원)으로 보내져 생을 마감했다. 이 도시 어디엔가 나의 죽음이 집중될수록 ‘무연고 유령들’의 인연도 촘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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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자들은 인천가족공원 안에서도 가족 있는 유골함과 구별돼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방’에 분리·안치됐다. 그들이 남긴 이야기도 잠긴 문안에 꽁꽁 봉인됐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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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 없는 목소리로 고함친다

내(1회 ‘정씨이자 배씨’)가 죽은 날 바다의 죽음도 시작됐다.

‘똥바다’(인천 중구 북성포구)가 매립되고 있었다. 그 바다의 갯골로 작은 어선들이 타고 들어와 선상파시(인천 해안 유일)를 열던 포구에 준설토(인천지방해양수산청이 지난 1월17일 착공)가 쏟아졌다.

나(2005년 사망 당시 40살·남)는 이미 시간 깊숙이 매립돼 있다.

이 땅의 삶을 40년 만에 끝낸 뒤 지난 13년의 시간 아래 매장됐다. 포구가 쇠락하고 배들이 줄어들수록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소주를 삼키는 마음들도 붉어졌다. 물고기 펄떡이던 부두가 시든 비린내를 풍기자 부두에 기대 살던 삶들도 살 발린 생선뼈처럼 앙상해졌다. ‘북성포구 나’로부터 100m 거리엔 내(2회 등장인물·2016년 당시 46살·남)가 웅크리고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 1m도 안 되는 ‘실핏줄 통로’ 안에서 두더지처럼 붙어 있다. 포구에 얹혀살며 눈에 띄지 않던 나와 나는 죽은 뒤 포구와 더불어 파묻히고 있다.

인천 해안선 99%가 갯벌을 지우고 조성됐다. 한번 죽은 갯벌은 되살아나지 않았고, 갯벌을 잃고 떠난 새와 조개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매립이 끝나 바다가 땅(7만㎡ 규모의 준설토 투기장)이 되면 포구가 품어온 삶들도 흙 아래 묻히고 말 것이었다.

나, 뼛가루로 무연고 납골당에 누적된 자.

나의 삶과 죽음은 언어로 건사되지 않았다. 내게도 그리워할 좋은 시절이 있었는지, 한때라도 단란했던 가족이 있었는지, 노동자란 이름도 갖지 못하고 거리의 사람으로 죽었는지, 도시가 놓친 나는 설명(임준 전 인천시 공공보건의료지원단장 “도시 개발의 역사는 취약 지역에 가난을 가두고 고립시켜온 과정”)해내지 못했다.

나, 죽었으므로 투명하나 살았을 때부터 보이지 않던 자.

말해도 발화하지 못하는 유령 195명이 성대 없는 목소리로 산 자들에게 고함친다. 나는 무연고여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조건(임준 “특정 지역에 몰리는 ‘죽음의 편중’을 멈추려면 도시 개발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존엄을 위한 자원 배분이 이뤄져야 한다”)이 아니어서 죽는다.

시간이 내가 살았다는 기억까지 매립하기 전에 나의 ‘이 말’을 꺼내 달라. <끝>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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