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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커버스토리]한국 찾아온 노르웨이 기자 “물량팀, 그게 무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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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 올슨(39)은 취재노트를 펼쳐 진민석씨(55·가명) 앞쪽으로 내밀었다. 큰 글씨로 Samsung(삼성)을 쓰고 그 밑에 Sungji(성지)를 적었다. Sungji 글자 아래 문어발처럼 선들을 긋고 그 끝에 여러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청구조가 이렇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들었는데 어느 단계에서 일한 건가요?”

진씨는 동그라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여기 있었지. 성지산업이 삼성에서 하청받아 하는 일이 ‘그라인딩’과 ‘도장’이었는데, 나는 도장을 했어요. 성지 밑으로 도장만 12개 반이 있었는데, 그중 3개는 성지가 직접 고용을, 나머지 9개는 성지와 직접 고용관계가 아닌 물량팀이었어요. 난 물량팀장이면서 성지반장이었고요.”

개인사업자인 물량팀장이면서 성지산업의 반장으로 불렸고, 법적으로 고용관계는 아니었지만 업무에 대한 모든 지시와 관리를 성지산업으로부터 받았다는 설명이다. 한국 조선업계의 기형적인 고용관행을 올슨은 제대로 이해했을까? 통역이 진씨의 말을 전하며 “이 말의 뜻을 알겠냐”고 묻자 올슨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물량팀은 조선소 하청구조의 맨 아래 있으면서 일감에 따라 주로 3개월 단위로 작업장을 옮기며 일하는 팀이다. 진씨의 경우 위장도급(불법파견)인 셈인데, 이 같은 일은 한국의 조선소에 만연한 불법이다. 물량팀 노동자들은 임금체불, 산업재해 등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복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으나, 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국경 넘은 하청 공급망, 노동의 안전 책임 물을 곳이 없었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1주기, 노르웨이 기자 크누트 올슨은 왜 한국을 찾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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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슨은 노르웨이 전국 일간지 클라세캄펜(Klassekampen) 심층보도팀의 12년차 기자다. 수도 오슬로에 본사가 있다. 올슨은 “진보적 성향의 신문인데 입장에 관계없이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읽는 신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지난 15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사고 1주기 취재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노동절이었던 지난해 5월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마틴링게(Martin Linge) 작업장에서 일하던 하청노동자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다친 사고가 있었다. 골리앗 크레인(800t)이 이동하면서 지브형 크레인(32t)을 건드렸고, 그 충격으로 지브형 크레인의 와이어가 마틴링게 작업장으로 떨어지면서 발생한 사고였다. 사고는 총체적인 안전 소홀 때문에 발생했다. 신호수와 운전자의 감시업무 소홀, 원·하청 작업지휘자의 현장 이탈, 크레인 간 충돌방지 시스템의 부재 등.

다단계 하청구조가 이 모든 위험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됐다. 다단계 하청구조는 ‘위험의 외주화’로 불린다. 원청은 안전에 투자하지 않으며 사고가 나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지난 16일 올슨이 인터뷰한 진씨도 크레인 사고 당시 추락하는 와이어에 스쳐 팔과 다리의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산업재해 보상은커녕 병원비조차 받지 못했다. 물량팀이라는 이유에서다. “성지산업은 삼성 현장에서 물량팀장이 산재 처리하는 것을 한 번도 못 봤다면서 해줄 수가 없다고 했어요.”

■ 마틴링게, 발주사는 노르웨이의 토탈

올슨이 한국에 체류한 시간은 지난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이었다. 서울에서 경기 이천, 다시 경남 창원, 거제를 훑으며 재해자와 민변 경남지부 지원단, 삼성중공업일반노동조합 등을 만나는 일정이었다. 그는 노동절인 5월1일에 맞춰 이들의 이야기를 몇개 면에 걸쳐 신문에 싣는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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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첫 일정이었던 16일 올슨은 경기 고양시의 한 추모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크레인 충돌사고로 사망한 박성우씨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박성우씨의 형이자 당시 사고의 재해자인 박철희씨(48)를 만났다. 박철희씨는 동생 성우씨와 함께 삼성중공업 하청노동자로 일했고, 사고일에 동생이 크레인 와이어에 깔리는 현장을 목격했다. 올슨은 조심스럽게 그날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불편하시겠지만 사고 전 상황, 사고 당시 그리고 사고 직후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박철희씨는 “함께 담배를 피우고 저는 먼저 자리에 일어섰고 동생이 휴게실 주변에 앉아 작업 도면을 보고 있었어요. ‘쾅’ 소리가 나면서 크레인 와이어가 추락했고 동생이 있던 곳을 덮쳤어요. 동생은 크레인 와이어에 직격으로 맞았는데 과다출혈로 죽었어요.” 박철희씨는 사고 상황을 설명하다 울음을 터트렸다. 응급처치나 구조 매뉴얼만 제대로 작동했어도 동생이 살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사고 직후 119에 제가 먼저 신고를 했어요. 그때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을 하는데, 사고 5분 후 119보다 먼저 사내 구조대가 왔어요. 심각한 상황인데 지혈 등 응급조치도 하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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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씨가 만들던 ‘마틴링게’는 프랑스계 노르웨이 정유회사 ‘토탈(Total)’이 발주한 것으로 바다에 고정식으로 세우는 원유시설 설비였다. 노르웨이는 석유가 주요 산업이고 노르웨이 정유회사들은 원유시설 설비와 선박 등을 한국 조선소에 발주하는 경우가 많다. 박성우씨의 죽음에 ‘토탈’은 책임이 없을까. 올슨은 노르웨이 정유회사에서 삼성·현대 등 한국의 중공업 회사로, 그 아래 하청업체와 다시 그 밑의 하청노동자로 이어지는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를 떠올렸다. 과연 노르웨이 발주사는 한국 노동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역할을 다했는가. 사고를 막기 위해 발주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그 권한을 이용해 한국 조선소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개선을 요구할 수 있을까.

삼성중공업 사고가 있기 전에도 조선소에서 하청노동자 사망사고는 끊임없이 발생했다. 2014년 한 해에 현대중공업에서 13명의 하청노동자가 사망해 큰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2015년 현대중공업산업재해네트워크는 사람이 죽어도 그대로인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 국외로 눈을 돌려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에 있는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등 선주사와 투자사들을 찾아 책임을 촉구했다. 당시 해당 발주사에 투자한 노르웨이 국부펀드에 공개서한을 보냈던 네트워크 측 김동현 변호사는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사회적 책임, 윤리적 성과를 투자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며 “국부펀드에 공개서한을 보내 이런 문제가 발생했으니 투자를 철회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올슨이 취재를 오게 된 계기도 네트워크의 공개서한이 가진 문제의식과 맞물려 있었다.

■ 사람보다 공사기간이 중요했다

올슨은 5명의 재해자들을 만나 이들에게 매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노동시간, 기숙사 환경, 사고 당일의 상황, 보상, 삼성의 사과, 이후의 삶 등등…. 재해자들의 말은 조금씩 달랐지만 쉴 틈 없이 일했고, 납기일에 쫓겨 종종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고, 사고 이후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점은 동일했다. 김정욱씨(가명)의 말이다. “2월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날이 많았어요. 4월에는 단 하루밖에 못 쉬었고. 휴일에 쉬는 게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한 팀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으니까 한 사람이 빠지면 전체적으로 일이 진행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요. 반장이 눈치를 주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노동절에도 마틴 급하다고 일해달라고 하니까 쉬려고 하다가 나왔어요.”

노동절 당시 정규직들은 쉬었지만 하청노동자들은 현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31명 재해자 모두 하청노동자들이었다. 사고현장을 목격한 후 트라우마에 시달려 치료를 받고 있는 윤동욱씨(가명)는 “삼성이라는 회사 자체가 안전을 강조하기는 한다. 그런데 일이 바빠지면 안전을 무시한다. 예컨대 도장과 그라인딩은 화재 위험 때문에 함께 작업하면 안되는데 한 공간에 밀어넣고 납기일 맞춰 작업을 하게 한다”고 말했다. 박철희씨는 “원래 납기일보다 늦어졌다면서 무조건 6월에 배가 나가야 한다고 했다. 조선소에서는 사람 한 명 죽는 것보다 공기(공사기간) 맞추는 게 더 이익이라는 말도 있다. 사람 한 명 죽으면 몇 억인데 공기 못 맞추면 훨씬 돈이 많이 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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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올슨은 노동조합이 강한 노르웨이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노동조건이라고 말했다. “정확한 수치는 비교해봐야 하지만 노르웨이보다 훨씬 많이 일하고 훨씬 적게 쉽니다. 노르웨이에서도 위험한 일은 있어요. 원유 시추선을 관리하는 작업 같은 경우 2주간 바다 위에서 일을 하는데 그러면 4주는 의무적으로 땅 위에 있어야 합니다. 법적으로 그렇고 또 지켜지거든요.”

그렇게 다급하게 밀어붙였던 마틴링게의 납기일은 지난해 6월13일이었지만 사고 이후 진행이 더뎌지면서 올봄에야 제작돼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올슨은 공사기간을 무리하게 단축한 데 대해 ‘토탈’이 설계를 수정 변경한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해볼 예정이다.

만약 노르웨이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올슨은 “크게 조사가 이뤄졌을 것”이라면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사고가 노르웨이에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산업재해는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노르웨이는 원청이 하청에 대해 양질의 근무조건을 제공하는 데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고, 국가가 이에 대해 감시하고 조사합니다.” 올슨의 말대로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이은주 마산창원거제산재추방연합운동 상임집행위원은 책임자 처벌이 미흡해 산재가 끊임없이 재발한다고 보고 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 등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부산지방고용노동통영지청에 고발했다. 그러나 노동청으로부터 “박대영 사장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노르웨이와 한국은 노동자 안전과 관련해 기업에 지우는 의무와 처벌의 무게가 다르고, 노르웨이에서는 불가능한 노동이 한국에서 가능하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한 국가에서 원청이 하청에 대해 양질의 근무조건을 제공하는 책임이 있다면, 글로벌 다단계 공급망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오늘날 이러한 원칙은 국경을 넘어서도 이행돼야 하지 않을까. 사고의 정확한 책임 규명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도 가려졌지만 재해자들은 답답할 뿐이다. 목격자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김은주씨(57)는 “외국에서 수주가 들어오면 인건비가 얼마나 측정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대기업은 수주받은 것을 분야별로 찢어서 하청을 주고. 돈을 아끼려고만 하니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국경을 넘은 공급망에 대해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국제적 협약들이 제정됐고, 여기에 대한 기업의 인식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사람이 죽어도 바뀌지 않는 조선소 노동현장에서 삼성·현대를 넘어 발주사를 압박하는 것도 조선소 노동환경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김동현 변호사는 “산재가 발생했다고 발주사가 이를 자신들의 법적인 책임으로까지는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본인들의 사회적인 책임, 또 경영리스크로는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며 “과거 현대중공업 사고에 대해 공개서한을 보냈을 때 세계 최대 선박회사인 덴마크 머스크사에서는 리스크 매니지먼트 담당자가 현대중공업 하청노조를 찾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올슨은 “ ‘토탈’이 책임질 부분이 있을지는 인과관계를 통해 알아봐야겠지만 일부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기사 하나로 크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번 한국 조선소 취재를 계기로 노르웨이 회사가 다른 국가의 회사에 발주할 때 어떤 회사에 투자를 하고 발주를 해야 할지에 대해 공론장을 마련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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