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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고난과 시련이… 그를 대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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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으로 망가진 추사 김정희의 굴곡진 삶 / 유홍준 필력으로 한 편의 대하드라마로 / 추사 젊은 시절은 淸?日까지 ‘완당바람’ 명성 / 제주에서 귀양살이 10년… 인생관 대반전 / 외로운 나날 그림 그리며 예술세계 구축

세계일보

유홍준 지음/창비/2만8000원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유홍준 지음/창비/2만8000원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 문화사의 위인으로 꼽힌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표적인 서예가다.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필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김정희 하면 흔히 추사체를 떠올린다. 하지만 추사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설명하는 이는 많지 않다. 글씨의 형태가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듯 더없이 반듯해 보이지만 노년기 시축에는 처연한 감성과 허허로움이 넘쳐난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필력은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한다. 꼿꼿한 조선 선비의 절개가 정쟁으로 망가져버린 추사의 지난한 삶을 한 편의 대하드라마로 풀어낸다. 확실히 ‘명작은 명작으로, 대가는 대가로 통한다’는 말처럼, 유홍준이 빚어낸 600여 쪽의 ‘추사 김정희’는 분명 다르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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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이 1857년 비단에 그린 김정희 초상화(보물 547호)다. 131.5×57.7㎝ 크기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추사가 서거하자 오랜 벗이자 정적이었던 권돈인은 이한철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초상화 윗면에 고인을 기리는 찬문을 직접 썼다. 창비 제공


저자가 이 책을 낸 데에는 곡절이 있었다. 애초 유 교수는 2002년 출판사 학고재에서 3권짜리 ‘완당평전’을 펴냈는데,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고문헌 연구가인 박철상 박사가 완당평전에 오류 200여 개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즉시 유 교수는 절판하고 2006년 분량을 3분의 1 정도로 줄인 전기 ‘김정희’를 새롭게 냈다. 이 책도 수명이 길지 않았다. 추사와 관련된 다양한 사료가 끊임없이 등장, 추사의 면목이 더 많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번 책은 유 교수가 12년 만에 선보이는 ‘김정희’ 개정판이라 할 만하다. 여타 김정희 전기물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책 전반에는 ‘완당바람’의 모습이 담겼다. 34살 젊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한 이후, 빼어난 기량으로 학문과 예술에서 이웃 청과 일본에도 알려질 만큼 국제적인 명성을 날렸던 시절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추사는 자신만만한 성격과 날카로운 독설로 미움을 샀다. 굴곡진 삶의 시작이었다.

추사가 인생관의 대반전을 이루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완성한 계기는 10년간의 제주도 유배와 함경도 북청 땅 유배였다. ‘세한도’와 ‘수선화’ 등은 이때 나왔다. 이 책에선 탱자나무 울타리에 고립된 채 질병과 싸우던 추사의 외로운 나날이 그림처럼 묘사된다. 책 후반부에서는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가 지금 용산 근처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수많은 명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강상시절을 다룬다. 추사 글씨의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잔서완석루’와 거의 신품의 경지로 평가받는 ‘불이선란’ 등이 이 시절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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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59세인 1844년 그린 ‘세한도’. 국보 180호로 23.3×108.3㎝ 크기다. 제자 이상적이 변함없는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그림과 글씨가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고고한 문기를 보여주는 명작으로 꼽힌다. 창비 제공


추사의 재능은 유명한 서예가 정도가 아니었다. 금석학, 고증학, 시문, 다도,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적인 학예인이었다. 추사는 당시 학문의 신사조이던 청나라의 고증학과 금석학을 들여와 조선의 현실에 적용했다. 조선에서 이룩한 성과를 다시 연경에 전함으로써 조선과 청 학계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받았다.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교수를 지낸 일본의 근대기 동양철학자 후지쓰카 지카시는 “청조학 연구의 제1인자는 추사 김정희”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청나라 문인 정조경이 추사를 만나 인사드리는 장면을 상상해 그린 ‘문복도’는 당시 추사의 국제적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유 교수는 추사가 오만하고 까다로웠다는 비판에 대해 “철저한 완벽주의에서 나온 면이 강하다”며 “인생을 대단히 적극적으로 살았다”고 옹호한다. 추사가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완성한 조선화풍을 중국식 문인화풍으로 바꿨다는 지적도 거부한다. 유 교수는 “추사가 청나라의 고증학적 학예를 따른 것은 그 나름의 근대화였고 세계화였다”고 평한다.

유 교수는 “18세기 영·정조시대는 문예부흥기라 일컬을 만하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같은 준봉들이 이어지면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에서 절정에 이른다”면서 “그러나 그 절정에 다다른 순간 저 멀리 안개 너머로 추사 김정희라는 거봉이 나타난다. 우러러보자니 아득하고 오르자니 막막하기만 한 천인절벽”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러시아 문학사를 말하면서 톨스토이라는 거대한 봉우리를 정상으로 삼고 거기에 올라 산마루에 다다르면, 그 순간 저 멀리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봉이 나타나게 된다”면서 “추사 김정희가 정녕 그런 모습”이라고 했다.

추사가 두 차례 귀양살이 끝에 예술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올곧은 조선 선비의 모습이다. 저자가 추사를 ‘한국 문화사의 위인 중 위인’이었다고 극찬하는 이유이다. 정민 한양대 교수와 한국고간찰연구회 회원들이 한시 번역을 도왔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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